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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망상과 불안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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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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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해체되기 전의 유고연방 헌법은 “유고가 적국에 항복하는 문서는 이 헌법에 의하여 무효다”라고 선언하였다. 나치 독일에 끈질기게 항전한 유고 국민들의 결기가 보인다. 적국에 항복한 후 이런 헌법 조항을 만든 나라도 있다. “(…)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1945년 패전 후 만들어진 일본 헌법 제9조다. 누가 읽어도 무력을 행사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하지만, 실상 이 나라는 이름만 자위대일 뿐 세계 5위의 전력을 가진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아예 자위대의 설치 근거를 명문화하려고 헌법 개정을 꾀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일본의 섭정 쇼토쿠 태자는 607년에 당나라 수양제에게 국서를 보낸 일이 있다. 그 초두의 글귀가 기이하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이 글을 보내노니….” 나라의 자존을 지키자는 거야 흠잡을 일은 아니지만, 당시의 국제질서 감각으로 볼 때 이런 태도는 과대망상이거나 무지에 가깝다. 수양제가 노발대발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 일본이 백제 멸망 후 한반도에서 벌인 663년의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시 13세기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놀라, 대륙과 한반도의 정세에 민감해진 것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중국을 정복하고 마지막으로 인도까지 지배하겠다며 16세기 말 조선을 침략하러 나섰다. 이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이한 세계관은 까막눈인 그의 개인적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동아시아 국제역학관계의 기본틀인 천하주의에 맞서 외부세계를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 보려는 일본인들의 인식이 표출된 것이다.

그다음엔 19세기의 정한론이라는 게 있다. 이것도 정상은 아니다. 이 침략론을 내세운 사이고 다카모리는 내내 극렬분자였으므로 그렇다 쳐도, 이토 히로부미의 정적이었고 자유주의자라는 후쿠자와 유키치마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본인의 대외인식이 삐뚤어져 있음을 말해준다. 그가 한 말은 이렇다. “조선 인민의 이해 전반을 논할 때는 멸망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이다.” 오만하다 못해 이상하지 않은가? 역사 왜곡 논란을 가져온 후소샤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정한론의 배경으로 조선 정부의 무례함을 들면서 사이고를 무사도 정신으로 조선을 개방시키려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통상 거부가 왜 무례하다는 것이며, 남의 나라에 무사도라는 폭력적 사고방식을 들이대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정한론은 망상이다. 일본인들의 의식에는 평화와 공존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일본이 치른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은 성격상 침략전쟁이거나 침략을 위한 예비전쟁이었다. 그중 청일전쟁을 기술하는 첫머리에서 후소샤의 교과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서 바다에 떠 있는 섬나라다. 이 일본을 향해 대륙에서 하나의 팔처럼 조선반도가 돌출돼 있다. 당시 조선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되고, 배후지를 갖지 못하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 방위가 곤란해진다.” 일본 문부성이 수정 지시를 내리기 전의 판본에선 여기에 “조선반도는 일본에 끊임없이 들이대어져 있는 흉기가 되기 쉬운 위치관계에 있었다”라는 문장이 붙어 있다.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지만, 또 다른 문제는 저들의 망상과 그 기저에 놓인 불안감이다.

승산 없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 미국을 ‘귀축’이라 일컬었다. 귀신과 축생의 줄임말이다. 그 귀축에게 항복하고 나서 일본은 미국도 이해하기 어려워한 굴종적 자세로 일관했다. 언제는 아시아가 야만이라고 탈아를 외치며 구미열강을 따라잡자(脫亞入歐)고 외치더니, 다시 대동아공영권을 이루자며 아시아인의 단결과 서구에 대한 대항이라는 미명 아래 중국과 동남아를 침략한다. 이 모순된 언동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스스로의 정체성 인식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열등감과 우월감, 피해의식과 가해적 성향은 이렇게 분열적으로 작용한다. 우월감은 실상 열등감의 다른 모습이며 가해자는 엉뚱한 피해의식에 젖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어령이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은 내부적으로는 한없이 축소지향적이면서도 외부로 나가면 서투르고 유아적이다. 침략전쟁에 선린으로서의 진정한 사죄가 없는 데엔 이런 자아분열로 인한 자존감 결여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섬나라이면서도 영국은 근대적 민주정을 창출하고 전통적으로 분열된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을 외교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비민주적 의사결정에 매여 있고, 통일대국이 들어선 중국 대륙과 오랫동안 독립을 지켜온 한반도를 앞에 두고 늘 위기의식과 불안감에 싸여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아베 총리가 측근들에게 “한국과의 관계는 앞으로 적어도 5년간 개선되기 어렵다”고 말하며 다닌다고 보도했다 한다. 지금의 한·일 간 갈등은 일본의 이런 인지왜곡이 빚은 퇴행적 현상이다. 오래갈 것이다. 호흡을 길게 가지고 마음을 다잡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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