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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만으로 끝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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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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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3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발표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짧은 글은 이 역사적 사건을 마치 예견한 것처럼 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지구적 차원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기에 역사는 드디어 그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에 대한 나의 비판은 이미 있었지만 지금 세계는 냉전시기보다 더 복잡해졌고 그 해법도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했던 그마저 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고 현재 너무나 다양하게 혼재하는 ‘정체성’과 이의 인정을 둘러싼 갈등을 그 요인으로 보고 있다.

‘미국제일주의’를 내세우고 등장한 트럼프의 미국 정체성이야말로 후쿠야마가 주장했던 역사의 종말을 분명하게 반증한 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중국의 도전, 푸틴의 러시아, 영국의 ‘브렉시트’, 다양한 형태의 포퓰리즘, 난민과 이주 문제, 빈부격차의 심화, 지구온난화 등으로 얼룩진 지구촌의 현재 모습은 자유민주주의와 이의 물질적 토대인 시장경제가 극히 동적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위기도 낳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달리 자유민주주의 위기를 과도한 개인주의와 팽만하는 소비지상주의에서 찾기도 한다. 정보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따른 다양한 사회관계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공급되는 정보의 수동적인 소비자로, 또 ‘4차 산업혁명’이 이미 예고하고 있는 맞춤형 소비자로 전락되어 개인의 자율성이 상실되는 위기를 맞았다는 사회문화적 진단이 그렇다. 그러면 자유주의가 처하고 있는 이런 일련의 위기에 대한 처방은 과연 있는가? 이에 대해 나는 이곳에서 주로 논의되는 내용을 우선 떠올리면서 이런 것들이 과연 한반도에도 통할 수 있을지 종종 자문하게 된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의 등장으로 모습을 확실히 드러낸 신자유주의는 수요보다는 공급 위주, 통제보다는 시장을 경제사회의 동력으로 보았고 이러한 정책에 후에 ‘자유주의적 좌파’라 볼 수 있던 블레어의 영국 노동당이나 슈뢰더의 독일 사민당까지도 동의했다. 좌파는 신자유주의가 낳은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극단적 개인주의가 낳은 문화적 위기나, 이주자 문제가 제기하는 정체성 문제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회적 통합문제에 과한 개인주의의 부정적 역할에 대해선 경고했지만 사회적 공공재부의 확충을 등한시했고, 갈수록 심각해진 불평등 문제에도 무딘 반응을 보였다. 전통적 정치세력의 이런 한계를 직시한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가 낳은 극심한 경쟁에서 탈락되거나 소외된 계층과 점차 불안해진 중산층의 일부까지도 끌어들여, 불과 10여년 만에 새로운 정치공간의 창출에 성공했다.

이런 상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나온 해법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적인 동력을 유지하면서도 안정적인 사회통합을 과감히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했던 블레어나 슈뢰더의 정책을 답습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더 이상의 대안은 없지 않는가 하는 반론도 많다. 그러나 이마저 현실화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좌우가 불안정한 연정을 유지하는 독일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와 달리 프랑스의 마크롱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하지만 이 역시 노조와 극우세력의 지속적인 협공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둘 때 현재 문재인 정부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에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는 ‘좌익정권’이라 몰아붙이고 다른 편에선 ‘촛불혁명’ 정신을 망각하고 개혁에 너무 소극적이라고 질타한다. 한반도의 평화체제로의 이행이라는 난제까지 고려하면 위 언급된 나라들보다 한국 상황은 더 어렵다. 현재 한국사회의 심각한 갈등구조는 근본적으로 국가와 재벌이 주도하는 경제성장을 위해 오랫동안 모든 걸 걸었던 데 기인한다. 이는 비록 역동적 사회를 만들었으나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크게 훼손시켰다. 외환위기가 등장시킨 DJ정부나 참여정부도 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촛불혁명이 탄생시킨 현 정부도 이 점에선 마찬가지다.

이런 문제는 그러나 단기간에 해결될 성질은 아니다. 예컨대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둘러싸고 효과가 없다느니 심지어는 경제학사전에도 없는 이론이라는 비판과 비난이 있다. 그러면 주류경제학의 사전엔 없는 개념이라고 해서 이미 많은 문제를 드러낸 정책을 그대로 답습해야만 하는가.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30년 전에 사라진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보고 우리의 통일문제를 풀어보려고 그동안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휴전선은 베를린 장벽보다 훨씬 더 견고하다. 세 차례에 걸쳐 남북 정상이 만났고 작년 9월에는 ‘공동선언’까지 도출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고 험난하다. 이런 때일수록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적극적으로 추동하는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태가 조금 더 지속된다면 그동안에 있었던 성과마저 곧 잊혀진다. 이번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초청해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를 풀어보려는 문 대통령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에 응할 수 없다는 북의 회신 내용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무릇 정책 수행에선 결과가 긍정적이고, 다수의 요구를 짧은 시간 안에 원만히 해결해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최적의 수단을 선택한다. 이를 위해 많은 경우 ‘집단적 지성’이라 할 수 있는 관료, 학자와 전문가 집단이 동원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믿는 건 모든 사람을 믿지 않는 것만큼 잘못됐다는 세네카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이들에게 신뢰만을 보낼 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소득주도성장은 경제학에 아예 없는 개념이라든지 또는 어정쩡하게 끝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종료 문제를 두고 국제정세도 못 읽으면서 오기나 부린다는 식으로 현 정부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현 정부의 정책은 ‘86세대’의 경직된 사고방식에서 비롯됐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대의 경험세계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길목을 통과하면서 형성됐다. 그렇기에 소득주도성장이나 GSOMIA의 종료와 같은 문제제기나 발상도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보이는 한국정치에 새로운 사고방식은 아니더라도 관성적으로 흘러온 것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건 꼭 필요하다. 같은 사고방식으로부터 발생한 문제는 같은 방식으로 결코 풀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충고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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