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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온전한 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다
편집부  |  tebba@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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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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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해준(전 브이코프 부락 이산가족협회 회장) ]

1.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남쪽나라로

1945년 여름에 우리들이 희망하던 해방이 왔으나 모국으로 되돌아갈 환향의 길들이 막혔다는 것을 깨닫고 어린 무리들이 슬프게 부르던 노래 한 구절이다. 저 푸른 하늘에 뜬 쪽배에 타면 바다를 건너 쉽게 고향으로 갈 수 있을터인데... 우리는 토끼를 부러워하였다. 해방 당시 나의 나이는 7살 밖에 안 되는 철머리 없는 어린이였으나 가라후토 땅이 타향이고 저 바다 건너 양친부모, 처자식, 형제들이 뼈저리게 기다리는 모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1세 노인들 사이에서 자랐으며, 더군다나 1953년 15살 되던 해부터 “조선로동자”(차후에 “새고려신문”으로 개칭)신문사에 우리 부락 주민들의 이모저모를 반영한 수백개의 기사 투고자로서 그들의 불쌍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대하여 잘 안다. 빈농으로 가라후토로 살길을 찾아와 일제시대 가와카미(현재 시네고르스크)탄광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들, 식솔 먹여 살리려고 돈벌어가지고 모국으로 꼭 귀환하시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들, 굶주리고 헐벗고 아버지 없이 보낸 쓰라린 아동시절에 대한 추억이 나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다.
나는 수십년 동안 우리 부락 1세 노인들과 그들의 아픔, 슬픔, 어려움을 같이 나누었으며 얼마간이나마 그들을 위로해 드렸다. 부락에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행사, 친척찾기운동, 모국방문, 영주귀국신청에 적극 참가하였다.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 소망, 요구가 담긴 기사를 <새고려신문>에 자주 투고하였다. 작년 여름, 시민활동가들이 우리 부락을 방문하기 직전에 “우리의 요구는 법적, 도덕적 근거가 있다. 일본은 우리 앞에서 반성하라”는 나의 기사가 새고려신문에 실렸다. 한국 손님들에게 나는 기사 내용을 소개해드렸다. 그들 중 우리 부락 고령할머니들의 생활 상태를 전해 듣고, 불쌍한 할머니들을 도와드리라고 500달러를 놔두고 간 바가 있다. 이후 한국에 돌아가고 난 후 2차례에 걸쳐 정성들여 모은 모금을 보내 와 쌀, 육류통조림, 식용유 등을 사가지고 불쌍한 할머니들에게 전해드렸다.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한 모금을 통해 모아진 1726달러를 고령의 할머니들에게 필자가 전해드렸다.
지난 정월에 새고려신문 지상에 내가 쓴 “부락에 한분의 강제징용자 한분도 남지 않았다”란 글이 실렸다. 나의 기사는 미망인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할머니들을 취재하러 대구방송국, 한겨레신문 송경화 기자님, 서울 MBC 정성훈 감독님이 우리 부락을 얼마 전에 방문하였다. 한국 기자들이 취재한 자료들이 한국에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우리들은 생각한다. 나는 우리 부락 노인들의 생활 실태에 대한 이야기를 발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신체장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서슴치 않고 승낙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와 우리 부락 주민들의 아픈 문제를 풀어나감에 조그만한 도움이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
사할린땅은 석탄, 목재, 가스, 원유, 수산물 등 자연부원들이 풍부한 섬이다. 일본강점자들은 남의 부원을 탈취하는데 강력한 노동력을 동원시키려고 카라후토땅이 낙원의 땅이며, 거기에서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널리 선전하였다. 일본강점자들이 주인노릇하는 한반도에서 압박, 착취, 무권리, 빈궁을 이겨내지 못해 혹시나 타향에서 행운을 찾을까 해서 모국에서 버림받은 불쌍한 조선사람들이 먼 길을 떠났다.
샥쪼르스크, 우글레고르스크, 보스냐꼬브, 레소고르스크, 쩰노브스크, 고르노자워드스크, 시네고르스크 등 탄광들은 20~30년도에 대폭적으로 운영되었다. 1932년에 만주땅에서 벌어진 침략전쟁에서 군사수요보장문제가 날카롭게 나섰음을 느낀 일본 군국자들은 그에 대해 큰 신경을 썼다.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에 원유매장지가 없는 형편에서 인조석으로 휘발유를 생산할 방법을 찾았다. 그 결과 질이 높은 브이코프 석탄이 인조휘발유 생산에 제일 마땅한 원료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1939년 여름에 탄광 갱내공사사업, 부락에 주택건설, 1년에 4십만톤의 인조휘발유를 생산할만한 화학공장건설에 착수하였다. 1944년에 철도부설과 석탄공장 건축사업이 완공되었다. 건축사업에서 일할 인부들은 최초에는 울산에서 모집으로 연행되었다. 1943년부터는 경북출생자들과 전라도 출생자들을 강제모집으로 데려왔다. 나이부찌탄광 강제징용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수가 800명쯤 된다고 한다. 그들은 양친부모, 형제, 처자식들과 생이별하고 정든 고향땅을 떠났다. 기아, 무권리, 착취와 압박, 빈궁이 불쌍한 젊은이들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2년 기한으로 괜찮게 돈을 벌어서 모국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선전이 “달콤”한 서위선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인들은 강제징용자들을 혹독하게 대우하였다. 강제징용자들은 소소한 죄를 지어도 사정없이 몽매를 맞거나 개처럼 바닥에서 기는 벌을 받았다. 일본인들은 2년이 지나면 한꺼번에 주겠다고 약속하고 월급대신 저축증서만 주었다. 그러나 힘겹게 일한 보답도 받지 못했다. 그때부터 근 60년의 세월이 흘러 일본사람들에게 혹독하게 몽매를 맞아 정신병자가 된 3분을 나는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생계비도 못 받고 빌어먹고 살다가 오래지않아 불쌍하게도 세상을 떠나셨다.
1945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종말이 닥쳐옴을 인식하고 자기들이 저지른 만행의 죄책감,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깊이 느꼈다. 너희들, 조센진들(조선사람들) 때문에 일본이 패전했다는 억지와 트집을 잡으면서 악을 품고 야수와 같이 혹독하게 행동하였다. 불쌍한 조선사람들의 앞길이 캄캄하였다. 그들은 악몽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한편 조선사람들은 1945년 소련군대가 가져온 해방을 환희로 맞이하면서 기뻐하는 부모형제, 자식, 처들이 안타깝게 기다리는 모국땅으로 귀환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희망은 멀리서 빛나는 샛별처럼 잠깐 비치고는 아지랑이처럼 사라져버렸다. 고위급 정치가들의 불찰로 환향의 길이 열리지 못한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낙심하였다. 타락의 감정에 빠져 헤매던 사람도 없지 않았으며, 어려움을 못 견디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 다수가 참을성 있고 근면성이 강한 사람들이다. 어려운 고비를 넘어 새주권, 새제도 하에서 새생활, 미래를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하였다. 자식들을 키우며 공부도 시키고, 차후에 부모 형제, 처자식들이 눈빠지게 기다리는 정든 고향으로 귀국할 간절한 소망, 희망을 가슴 한구석에 고이 간직하고 열심히 살았다. 해방 전에 어려운 고비와 온갖 난관이 가득찬 삶의 길을 밟아온 불쌍한 1세들은 억울하고 원통하고 비참한 운명을 전후 또다시 겪게 되어 기나긴 50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후에야 뼈저리게 기다리던 환향의 길이 열리었다.

3
십년이 지나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해방 후 63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갔으니 1세 노인들의 생활에서도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다. 무정한 세월은 불쌍한 노인들의 아까운 생명을 사정없이 빼앗아갔다. 필자는 수백명의 1세 노인들의 생애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였다. 나의 기사 속의 1세 노인들은 소련시대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영웅들이다. 레닌 탄생기념 100주년의 기념메달, 노동노병메달을 수여받았고, 석탄공업의 사회주의전쟁 특수자에서 휘장 수행자인 명예탄 김대봉 탄부들 칭호를 받은 박홍구, 이인모, 선진국, 최태창, 최봉수 등이 그 분들이다. 그러나 수많은 할아버지들이 그리운 고향땅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부모와 형제, 처자식들의 생사도 모른 채 불쌍하고 억울하게 원통하게도 이 세상을 떠나서 우리 부락 근처 공동묘지에서 주무시고 있다.

1세노인들 중 적지 않은 분들이 독신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묘지는 무명묘지들이다. 성묘도 하지 않으니 묘지들이 보잘 것 없게 되었다. 자식들이 있는 분들의 묘지들은 알뜰하게 정돈되어 있고 비석도 서 있다. 그러나 비석에 붙어 있는 사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언제나 수심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이다. 혈육과 재회의 원을 풀지 못하고 그들의 생사도 모르고 차디찬 타향땅에 묻혔으니...
그러던 중 30명가량의 1세 노인들은 모국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풍웅, 조병기 할아버지는 다른 길을 택하였다. 그들은 자식들과 이별한 채 영주귀국 해서 사는 것을 상상조차 못했다. 1993년부터 브이코프부락 이산가족회장의 직책을 담당하기 시작한 때부터 두 분의 할아버지에게 수차례 영주귀국하셔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것을 당부하였지만, 마음은 간절하나 차마 자식들을 놔두고 떠나기를 강경히 거절하였다. 허나 지금이라도 자식들과 함께 갈수만 있다면 당장 모국으로 떠나겠다고 말하신다.
나는 할아버지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말 못하는 짐승들과 새들도 자기 새끼들을 잃어버리면 애달파한다는데 인간으로서 자식들과 갈라져서 산다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할아버지들은 영주귀국문제가 정당하게 풀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불과 2~5년 전에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셨다.

4
조병기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우리 부락 강제징용자들 중에서 마지막이다. 현재 브이코프부락에 강제징용자는 한 분도 안 계시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 부락에서 강제징용자들이 다 세상을 떠났다고 우리들의 아픈 문제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해방직전에 적지 않은 여성들이 나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강제징용으로 끌려 간 남편들을 찾아와서 아픔과 슬픔, 설움, 온갖 어려움을 그들과 나누었고, 다수 할머니들은 남편들을 따라 저승으로 가셨다.
현재 우리 부락과 이웃 부락 우글레자워드스크 부락에는 80세가 넘은 1세 노인들이 6분 생존해 있다. 그들의 주택을 방문했을 때 여러 가지 가정용물품들이 알뜰히 갖추어져 있어 할머니들이 괜찮게 지내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생활을 가깝게 알아보면 그들의 운명이 비참하고 비극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복녀 할머니는 팔순 고개를 이미 넘어선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그에게 정상적 간호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 자체가 우리들의 중업이었던 탄광이 폐광됨에 따라 직장을 못 찾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할머니들은 살뜰한 도움, 배려를 받기 힘든 상황이다. 김복녀 할머니의 딸 순자씨는 부락에서 일자리를 못 찾고 며칠씩 타지방에서 일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는 중풍으로 신음하는 남편과 눈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다. 앞을 못 보는 어머니와 남편을 돌보려니 순자씨에게는 걱정일 수밖에 없다.
자식들의 손이 못 미칠 때는 할머니가 손수 손으로 더듬어 가면서 밥도 짓고 국도 끓인다.
“참, 내 신세가 딱하지요. 앞으로 더 살자니 고통스럽고요. 내가 바랄 것은 단 하나 뿐이지요. 하늘이 날 데리고 가는 것이지요. 그래야 자식들이 편안할텐데..”
하시며 슬픈 어조로 말씀하셨다.

5
해방 후 63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흘러갔으나 우리들의 아픈 문제는 정당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 풀려나가는 영주귀국문제는 온전치 못하게 풀려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식들 없는 영주귀국은 또 한 번의 이산가족의 비극을 빚어 내지 않는가! 자식들과의 귀국문제, 사할린잔류자들 문제의 해결은 필연적이며 더는 지체할 수 없는 긴급한 문제이다.
많은 분들의 완강한 수고로 인하여 온전치는 못하나마 영주귀국문제는 풀리어 나가고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사할린에 잔류하는자들의 문제 해결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영주귀국자들은 혜택을 받는데 왜 사할린에 남은 우리들은 혜택을 못 받는가!’ 강제징용자 차병철 할아버지의 아내 김봉순 할머니는 그 이유를 추측도 못하신다.

한국측에서는 사할린잔류자들은 러시아국적을 가졌으니, 그리고 일본측에서는 일본에 개인적으로 보상하는 법이 없으니..등등으로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나의 설명에 “우리들이 잘못인가? 이렇게 우리들이 쓰라리게 인생을 지내는 것이 누구의 탓인가요. 일본사람들의 탓이지요! 근본 장본인인 일본이 책임져야지요!!”
하며 김봉순 할머니는 한탄하셨다.
국제법과 민법에 모르는 무식한 할머니가 우리들의 역사문제를 인간적, 도덕적인 측면에 기초하여 공정하게 해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셨다. 유식한 일본정치가들이 이것을 이해 못하니 억울하고 한탄할 뿐이다. 더러운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는 법. 일본이 정녕 깨끗한 민족이라면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인접 나라 앞에서 범한 야만적 행동에 대하여 반성하고 피해자들에게 물질적, 양심적으로 보상하여 자기들의 죄를 씻어야만 전범이라는 오명을 벗어나 세계 인류가 인정할 문명국이 될 것이다.
나는 영주귀국문제가 풀린 다음에 잔류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분들의 말이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96세가 된 김옥지 할머니와 90세인 김화예 할머니, 앞을 보지 못하는 김복녀 할머니, 고혈압으로 신음하시는 전달조 할머니는 이 문제가 풀릴 때까지 생존하실까 의심스럽다. 지금도 나는 영주귀국문제와 잔류자들의 문제는 쉽게는 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부락에 있는 역사의 산 증인이신 6분의 불쌍한 할머니들과 이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할린한인들에게 죽기 전에라도 보살펴 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력히 강조하고 싶고, 나아가 지방 한인사회단체들도 자원봉사를 자구책을 마련하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 있어서 한국의 네티즌들과 활동가들이 베풀고, 이곳에 파견된 한국 사람들의 물심양면적인 도움을 주셨던 것은 과히 칭찬받을 일이며, 사할린한인들에게는 큰 보탬이 되었다고 여긴다. 한국에서 오신 남혜경 박사는 오래전부터 브이코프 탄광촌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며 불쌍한 노인들에게 물질적 원조와 격려, 위로를 아끼지 않는다. 이 기회를 얻어서 따뜻한 사람과 인간애로 손을 내밀어주신 자원봉사자 여러분들께 부락의 주민들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6
우리 부모들은 역사의 희생자들이다. 이 비극은 마지막 조선 임금의 무능한 정책이 빚어낸 것이며, 따라서 우리 민족은 명예와 자존심마저 잃어버린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 침략자들은 우리 민족에게 소위 내선일체, 황국신민을 안겨주어 조선과 일본이 하나이고, 일본사람과 조선사람들은 일본 천황의 신하라고 일컬으면서 우리나라를 삼키어버린 장본인이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은 수난의 역사를 밟아 왔다.
60여년 전에 우리가 희망하던 해방이 왔으나 온전한 해방이 아니다. 두 나라로 분단된 우리나라는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기나긴 세월이 흘렀으나 우리들의 아픈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못했다. 현재 한국은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된 나라로써 분명히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비참한 지난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모국에서 살건 해외에서 살건 그 어디에서 살건, 우리나라의 부강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살아나가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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