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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과 히틀러 '닮은 인간, 다른 전쟁'['다키스트 아워']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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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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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 / 작가

히틀러 본질은 미치광이 전쟁광… 처칠은 전쟁에 천부적인 재능
히틀러가 서유럽 침공한 날, 짠 것처럼 처칠도 영국 총리에 올라
한쪽은 자유와 평화 위해 능력 발휘, 다른 쪽은 그걸 파괴하려 해

   
 

미친놈이 미친놈을 알아본다. 1938년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맺고 돌아왔을 때 영국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쓱해진 체임벌린은 6개월이면 휴지 조각이 될 협정문을 흔들며 이렇게 외쳤다.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자기가 상대하는 인간이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몰랐다. 유대인을 절멸하고 슬라브인을 모조리 노예로 삼겠다는 히틀러의 공언을 은유법으로 들었다. 전 유럽을 상대로 음험하고 거대한 사기극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하게, 처칠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히틀러의 본질이 미치광이이며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전쟁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아니 본능적으로 알아봤다. 둘 다 '전쟁 친화' 유전자를 타고났으며 전쟁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라면 한쪽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 능력을 발휘했다면 다른 한쪽은 그것을 절멸하고자 의지를 불태웠다는 정도일 것이다.

어린 시절 처칠 방을 들여다본 아버지는 기겁했다. 방 안에 장난감 병정 수천 개가 기병 한 여단과 보병 한 사단으로 정렬해 있었다. 사내아이들이 병정놀이를 하는 일이야 동서에 흔해 빠진 유년이지만 이렇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경우는 드물다. 처칠의 동생도 군대를 '보유'했지만 병사들은 모두 흑인이었고 대포는 한 문도 없었다. 구조적으로 처칠이 매번 이길 수밖에 없는 배치였다. 이기는 전쟁이 어린 처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본 구도였고 상대는 감히 대영제국에 대드는 식민지의 '컬러 피플'이었다. 실제로 스물다섯이 되던 해 처칠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혐오스러운 이슬람인들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강렬하고 원초적인 욕망에 시달리고 있어요." 무슬림이 싫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고 싶어서 강렬하고 원초적인 욕망에 시달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명백하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청년이었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아이를 군인으로 만들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관학교에 두 번 떨어진 후에 겨우 합격했는데 보병이 아니라 기병이었다. 기병은 말을 사야 했으므로 돈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 말고는 쓸모없고 재능 없고 희망 없는 3무(無) 아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을. 병과야 어떻든 군인이 된 처칠은 날개를 달았다. 쿠바와 인도에서 전투에 참가했으며 보어 전쟁에서는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서 전쟁 영웅 소리를 들었다. 처칠은 자신이 전쟁에 천부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전투에 뛰어들었을 때의 그 행복감, 그리고 샘솟듯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의 세례에 그는 미칠 듯한 열정에 휩싸였다. 그가 또 다른 재능을 깨달은 것도 이즈음이다. 글을 쓰는 일이었다. 명성을 얻고 싶어 안달 난 청년에게 이만큼 좋은 경로는 없었다. 주요 매체에 글을 기고하면서 처칠은 억대 수입을 올렸다. 정치적으로도 서광이 비쳤다. 다소 부풀려진 경력과 뛰어난 말솜씨로 그는 스물여섯 나이에 하원 의원이 된다. 이어 정부 요직을 하나씩 밟아나가지만 해군 장관이 되어 벌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 패배로 그는 나락으로 처박힌다. 캄캄한 처칠의 인생에 손을 내밀어 준 것은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가 서유럽을 침공한 '낫질 작전'을 벌인 1940년 5월 10일, 처칠도 마치 짠 것처럼 총리 자리에 오른다. 동맹국은 모조리 항복하고 국민 여론은 협상 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 처칠은 '피와 땀과 눈물' 같은 무시무시한 연설을 하며 가끔 설득, 주로 독선으로 18개월을 히틀러와 맞서 싸웠다. 당시 처칠을 영상에 옮긴 것이 영화 '다키스트 아워'다. 처칠은 왜 협상 대신 전쟁을 택했을까. 영화 속에 힌트가 있다. '일개 상병 따위가'로 히틀러를 계급적으로 밟더니 '악랄한 페인트공'이라며 싸구려 화가였던 전력(前歷)을 비하한다(자기도 그림 좋아했으면서). 같은 혈맥이지만 금수저가 흙수저에 대해 품은 불쾌함과 혐오가 처칠의 고투(苦鬪)를 가능하게 해 준 동력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지만 그렇게 의심해 볼 수밖에 없는 영화가 '다키스트 아워'다. 처칠과 히틀러의 '닮은 인간, 다른 전쟁'은 또 다른 처칠 영화 '덩케르크'를 통해 이어서 말씀드리겠다. 미쳐도 올바르게 미친 인간이 어떤 것인지 처칠은 제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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