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0.5.29 금 16:09
재외선거, 의료보험
> 오피니언 > 본국지논단
외환위기의 기억
경향신문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3.31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박종성 / 논설위원

   
 

과거의 추억이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때론 위안이 되지만 고통이기도 하다. 당장의 현실이 죽을 듯 괴로울 때 과거에 대한 기억은 더 고역이다. 좋은 기억은 오래가지만 나쁜 기억은 더 오래간다.

20여년 전 이른바 ‘IMF 위기(외환위기)’를 살아온 세대들은 찬바람의 세월을 기억할 것이다. 고도성장을 만끽하며 성급하게 샴페인을 터뜨린 뒤 세상살이는 변했고 민초의 인생이 달라졌다. 국가경제의 파탄은 시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기업 규모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던 사람들은 기업의 폐업, 구조조정에 따른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자영업자는 충격을 온몸으로 받고 쓰러졌다. 졸지에 닥친 실직은 인생유전의 시작이었다.

일자리가 사라지자 돈줄이 끊겼다. 그리고 이는 은행에 손을 벌리게 만들었다. 연 20%에 가까운 고리에도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은행권이 막힌 실직자는 제2금융권, 최후엔 사채업자를 찾았다. 이는 생명을 연장하는 ‘산소호흡기’일 뿐이었다. 연체로 인한 독촉장이 쌓이다가 ‘빨간 딱지’가 붙고 가족은 길거리로 나앉았다. 집을 나와 일자리를 찾아 도시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공원과 지하철역은 집 나온 구직자들로 가득 찼다. 위기 상황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찾아오듯 노숙인들은 줄었고 경제지표도 나아졌다.

정부는 3년8개월 뒤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졸업을 발표했다. IMF에서 빌린 돈을 조기상환하면서 모범적인 국가로 다시 일어났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렇지만 시민들의 생활이 외환위기 전으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다. 한번 나락으로 떨어졌던 사람들의 생활은 대부분 열악해졌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화려하게 다시 일어서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 속의 판타지일 뿐이다.

외환위기로 일자리를 잃었던 사람들의 실상은 ‘눈물의 비디오’ 주인공들의 그동안 삶이 보여준다. 제일은행에서 명예퇴직한 직원들의 삶은 대부분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대부분 동료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퇴사를 자청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중산층의 삶은 무너졌다.

외환위기는 한 시대의 끝을 알렸다. ‘신화의 시대’ 종말이다. ‘고도성장의 시대’는 끝났다. 성장률이 10% 가까이 이르면서 오히려 경기과열을 걱정하던 시대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 마이너스 성장을 우려하는 시대로 변했다. ‘다산의 시대’도 끝났다. 외환위기 이전 합계출산율은 1.6명 이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1.5명을 넘어선 적이 없다. 이젠 1.0명도 안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삶이 팍팍해지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평생직장의 시대’도 마감했다. 기업에서 직원을 채용해 은퇴할 때까지 ‘가장이 가족들을 돌보듯’ 했던 관행은 끝났다. 정규직은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양산됐다. 일자리가 줄었고 일자리의 질도 악화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세계 경제가 얼어붙고 있다. 외환위기, 금융위기를 겪은 뒤 또다시 경제위기다. 한국 경제는 올 들어 완연한 회복세가 전망됐지만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뒤집어놓았다. 예상치 않은 위기의 도래, 블랙스완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엔 ‘더 크고 센 놈’이다. 20년 전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일부 국가에 국한된 문제였다. 10년 전 금융위기는 미국이 진원지인 사건이었다. 국지적인 위기였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는 전 지구적인 위기다. 충격의 강도를 가늠할 수 없다.

한국은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거리에 인적이 끊기면서 자영업은 초토화되고 있다. 대기업이라고 상황이 나을 것도 없다. 항공·자동차·소비재·여행업계 등으로 피해가 확산하고 있다. 이는 결국 일자리의 상실·소멸로 이어진다. 최근 고용노동부의 ‘2월 노동시장 동향’을 보면 지난달 실업급여 신규 신청자는 10만7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33.8% 늘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 자명하다. 실직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두고두고 괴롭힌다는 사실은 외환위기 이후 경험한 바다. 상처는 단지 아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아무리 좋은 우비를 써도 비에 젖을 수밖에 없다. 암울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다.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 110-888 서울시 종로구 종로 19 B동 1118호 (종로1가, 르메이에르종로타운)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유정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