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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고궁(古宮)과 요령성 박물관을 관람하다고조선 유물 삼구병, 기후방정 목격…중국의 역사 왜곡 발견
이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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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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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학회 회장

   
 

우리 일행은 집안에서 이틀을 묵었으며 장군총, 광개토호태왕릉비, 환도산성, 산성 아래의 통구고분군, 오회분 4호묘, 5호묘의 고분벽화와 국동대혈 및 압록강까지 답사 후 다시 버스를 타고 통화를 지나 고속도로를 타고 심양으로 향했다. 오후 늦게 심양에 도착해 凱萊大飯店(Gloriaplaza Hotel)에 숙박하기로 했다.

처음 심양을 방문한 이후 십년 만에 온 셈이다. 낙후했던 심양역 부근이 고층 건물과 고층 아파트로 변해 있었다. 대로변에는 4~5층 높이의 건물들이 같은 형태로 줄지어 서 있었다. 정부에서 일률적으로 지어준 모양이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예전의 어두운 모습이 아니라 훨씬 밝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만큼 중국 경제가 발전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우리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심양의 야시장에서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조의방(趙義方) 사무국장과 일행인 변시홍(邊時弘) 심양문화원 관장을 만나 묘향산 조선술집에서 회포를 풀었으며, 또한 7명의 일행과 함께 양꼬치집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심양에 올 때마다 병자호란 때 이곳 심양으로 잡혀와 고문으로 순국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삼학사를 비롯해 포로로 잡혀왔던 20여만명의 조선인 부녀자들의 고통소리를 되뇌곤 했다.

이튿날 오전 9시부터 심양시내에 있는 요령성 박물관을 관람했다. 진·당 이후 청시기까지 각 시기의 그림, 서예, 도자기, 비문, 청동기 등의 문화재들이 전시돼 있었다. 특히 유현(劉賢)의 묘지를 비롯한 여러 명의 묘지와 탁편이 보였으며 1970년대 초에 발견한 홍산 유적지에서 발견한 백옥저룡(白玉猪龍), 대옥룡(大玉龍), 옥수형기(玉獸形器) 등의 유물도 보였다. 또한 홍산의 북동촌에서 발견된 고금문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들도 볼 수 있었다. 요양지역의 한묘(漢墓) 등의 유적도 있는데 정확한 시기 비정에 애매함을 느꼈다.

박물관에 전시한 불상들의 모습도 시기별로 특징이 있었다. 북조시기인 북제(北齊)의 불상은 미소를 머금은 웃음의 모습인 반면, 수(隋) 시기는 은은한 미소 띤 모습이었다. 당(唐) 시기의 보살입상은 서역의 영향을 받아 풍만한 모습이었다. 청(淸)의 관음보살은 눈을 감은 웃는 모습이었으며, 명(明)의 동자불상은 불균형의 모습이었다.

요령성 박물관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 전개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문화재로 본다면 이들이 이름 붙인 ‘삼구병(三勾兵)’과 ‘기후방정(箕侯方鼎)’일 것이다. 이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B.C 24세기경의 유물이다. 초기 고조선 시기에 제작된 청동기이기 때문이다.

중국학계 왕국유는 이 삼구병을 “은상시기 북방제후국들이 사용했던 기물이다”고 비정했다. 이 삼구병은 1900년 초 하북성 보정시의 청원 남향에서 발굴된 ‘당우삼과병명(唐虞三戈兵銘)’이라는 청동의 세 자루 칼을 말한다.

이 ‘삼구병(三勾兵)’에 대해 왕국유의 비정 연대는 B.C 17세기 말 이후로 간주했다. 그러나 낙빈기는 이 청동기가 4300년 전 오제(五帝) 시기 즉 백익(伯益)의 재위 시기인 B.C 24세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그의 저서 ‘金文新攷’에서 논증해 밝혔다. 낙빈기는 이 청동기 명문이 ‘고양의 3대 직계 자손의 족보’임을 밝혔다. 즉 첫째 칼에는 고양을 비롯한 신농의 손자들의 인물들이 새겨져 있으며, 둘째 칼에는 신농의 증손자인 고양의 아들들이, 셋째 칼에는 신농의 고손자인 고양의 손자 순 임금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당우삼과병명(唐虞三戈兵銘)’에 대해 중국 청 말의 저명한 학자인 왕국유의 견해와 현재의 낙빈기의 견해가 다른 이유는 왕국유가 은상(殷商) 이전의 역사를 부정한 고사(古史) 부정론자이었기 때문이다. 즉 왕국유는 은상시기인 B.C 17세기 말~B.C 11세기로 비정했다. 발견된 대부분의 중국 청동기의 비정 연대를 중국 학계는 은상(殷商) 이후로 비정하기 때문에 크나큰 역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1973년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에서 20여개의 청동기들과 함께 발굴된 ‘기후방정(箕侯方鼎)’과 다른 청동기들 역시 B.C 24세기 이전의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학계는 B.C 12세기 이후의 商周시기로 비정했다는 점이다. ‘기후방정(箕侯方鼎)’ 명문의 丁亥년은 高辛 47년 B.C. 2374년이다.

따라서 ‘기후방정’의 제작 연대는 B.C. 2374년임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중국학계의 잘못 비정한 청동기 연대에 근거해 이형구는 ‘고죽국’의 존재와 ‘기자동래설’을 1970년대 초에 주장하기 시작했으나 이는 완전한 허구의 역사를 그린 것이다.

‘기후방정(箕侯方鼎)’의 기후(箕侯)는 B.C 24세기의 인물이고, 商말 周초의 기자(箕子)는 시기적으로 거의 1200년의 차이가 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학계와 이형구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기후방정’과 같은 곳에서 발견된 청동기는 둥근 모습의 罍에 새겨진 청동기의 명문은 “父珠晉(進)系(繼)諸(鏵)”이다. 이 명문의 해석 역시 이형구 등은 잘못 해석했다.

즉 “父珠의 뒤를 이어받아 鏵족의 제후인 내가 왕이 됐다”는 내용인데 이형구 교수는 ‘고죽’으로 해석해 기자조선의 동래설을 전파시켰다. 이 명문은 마지막 왕이었던 伯益과 연관된 청동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청동기의 단대는 伯益이 임금이 된 해인 B.C 2303년이다. 이형구 교수가 이 명문을 ‘고죽’으로 읽은 이유는 그의 스승이 100년 전 시작한 중국학계의 ‘고사부정론’의 영향을 받은 대만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古史否定論’은 고힐강이 주도했으며, 호적, 양계초, 왕국유 등이 동조해 殷商 이전의 모든 고대사를 신화로 간주해 부정했다. 따라서 현 중국학계는 이와 같은 100년 전 ‘古史否定論’자들의 잘못된 견해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중국학계의 모든 청동기 비정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商代를 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중국의 청동기 비정은 허구라고 단언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형구처럼 중국학계의 잘못 비정한 청동기를 근거로 ‘기자동래설’과 ‘고죽국’과 관련된 논문을 쓰는 학자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또한 이들 중국학계의 주장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유학을 했던 분이 대다수이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의 문헌을 번역하거나 인용한 이들로 양동숙, 하영삼, 최남규, 곽노봉, 송호정, 이형구, 심재훈, 박대재, 오강원, 조원진, 조진선, 이유표 등이다.

우리 일행은 요령성 박물관을 관람한 후 1644년 북경으로 입관하기까지 후금의 도읍으로 삼았던 심양고궁을 관람했다. 혹독한 추위의 자연환경 탓으로 왕들의 숙소는 크지 않은 규모였다. 이후 우리는 심양시의 서문거리를 거쳐 백암산성을 가기 위해 비포장된 시골기로 접어드니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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