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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제3의 아베를 끌어안는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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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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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 논설위원

아베 물러나도 반한 기류는 여전
스가는 위안부 합의 번복에 실망
지도자의 용기만이 이 상황 타개

   
 

일본의 한 주간지가 “아베 사임을 가장 반기는 건 한국일지 모른다”고 썼다. 이웃 나라 지도자의 불행 앞에서 차마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할 한국인의 속마음을 읽은 게 아닌가 싶다. 일본 국내나 국제사회의 총체적 평가와는 별개로, 한국인은 최악의 한·일 관계를 만든 장본인으로 아베를 기억한다. 역사수정주의와 강고한 내셔널리즘에 뿌리를 둔 아베의 도발적 행동과 정책이 한국인을 불편하게 했고, 안방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때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담을 거부해 왕따로 만든 노골적 한국 때리기가 분노를 일으켰다. 지난해 수출규제를 기화로 일어난 불매운동 구호가 ‘노(No) 재팬’에서 ‘노 아베’로 바뀐 게 그런 분노를 대변한다. 경위야 어찌 됐건 노 아베가 이뤄졌으니 한·일 관계는 개선될 일만 남았다는 기대감이 항간에 있는 듯하다. 사임 발표 직후 참모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는 문 대통령의 메시지에서도 그런 기대가 읽힌다. 그렇게 된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도 일본 사회 전반의 기류가 바뀌었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과거 일본 정치를 설명할 때 ‘진자(振子)의 법칙’이란 게 있었다. 시계추가 좌우로 움직이듯 일본 유권자들의 표심이 한 번은 보수 우파, 다음 선거는 리버럴(혹은 진보)로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다. 자민당 안에서도 온건 리버럴과 강경 매파가 균형을 이룬 게 파벌정치였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 새 진자의 중심축 자체가 크게 오른쪽으로 이동한 결과, 추의 방향과 진폭은 무의미해졌다. 자민당은 대표적 매파인 세이와카이(淸和會·현 호소다파)의 독주로 굳어지면서 파벌 간의 색깔 차이도 사라져 버렸다. 합리적이고 겸허한 과거사 인식의 소유자나 개헌 당론에 반대하는 정치인은 설 땅이 없다. 야당은 더욱 지리멸렬이다. 그러니 아베가 물러나도 제2, 제3의 아베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게 지금 일본 정계의 현실이고, 사회 전반의 분위기다. 이른바 ‘주류 교체’가 확고히 실현된 것이다. 일본과 싸워서 끝장을 보려 하든, 대화로 문제를 풀고 화해하려 하든 일단은 이런 일본 내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일본 내에서 친한파가 소멸 직전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설령 남아 있다 해도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분위기다. 이건 일본 탓만 할 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문제가 없는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친한도, 반한도 아니었다가 최근 확실한 반한으로 입장을 굳힌 사람도 드물지 않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스가 요시히데(管義偉) 관방장관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본다. 지난해 도쿄에서 만난 정계 소식통에 따르면, 스가 관방장관은 자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가 사실상 뒤집은 데 대한 반감과 실망을 사석에서 표시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병기-스가’ 라인을 가동시키며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된 데 대한 반발심이 상당히 깊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일 양국 정부 사이에는 헤어나기 힘든 불신의 늪이 가로놓여 있다. 영원히 척지고 살 요량이라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양국 지도자가 나서서 타개하는 수밖에 없다. “네 탓이오”라며 상대방 입장이 바뀌기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바뀔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제2, 제3의 아베가 나와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얘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내의 반일 감정이 만만치 않던 1998년, 과거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의 변환을 담은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채택하고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다. 집권 이전부터 오랫동안 가다듬어 온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지만, 이를 실천으로 이끈 건 반대 여론을 직접 설득하겠다는 용기와 가시밭길 협상을 우직하게 이어간 인내심이었다. 일본의 새 정부 출범은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용기와 인내심을 발휘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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