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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시절' 속 '嫦娥'가 찾은 尙雅​
대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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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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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경 / 재한조선족작가협회 이사

   
 

요즘은 한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살아가면서 자식들을 데려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그 자식 때문에 고민하는 부모들을 가끔 보게 된다. 이제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행복하게 보낼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부모의 바람대로 살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가 사람도 만나지 않고 일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 밖에 나가지도 않고 핸드폰과 컴퓨터만 끼고 산다며 속상해했다. 돈이야 아직까지는 부모가 벌면 되는데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그늘을 드리우는 모습을 보면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헌신적으로 살아온 부모입장에서는 속이 상할 것이다.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부재를 겪어본 경험이 있는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또 문제가 달라진다. 아이는 왜, 누굴 위해 한국으로 왔는가. 혹시 부모의 욕심이나 그들의 편의 때문이 아닌, 자신의 오롯한 의지에 의해 한국행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소설 '천진시절'(금희, 창비, 2020.)에는 고향을 떠난 청춘들의 서사가 담겨져 있다. 무군과 함께 고향을 떠난 상아가 있고, 고중때 부터 첫사랑인 희철과 사귀여온 정숙이 있다. 그리고 한국인 사장과 동거중인 것으로 보이는(?) 그녀들의 직장동료 미스 신이 있으며, 어떤 사장을 만나 당분간 그 사람의 일을 봐주며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땐 관계를 끝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상아의 고향친구 춘란이 있다.

 '천진시절'에서 상아가 회상하는, 천진에서의 생활은 1998년이 배경이며 서사가 여성위주로 흘러간다. 그러나 20년도 더 된 시기에 이 소설속 등장인물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당시 타지로 이동하던 조선족들이 이제는 외국으로도 이동했고, 살아가는 모습 역시 그네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의든 타의든 현재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천진시절'의 청춘들이 그랬듯 재한 조선족들은 더 나은 삶과 좀 더 확실한 미래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서울시절’이 활자로 돌아다녀도 모자랄 판국에 지난 세기를 배경으로 한 '천진시절'이 왜 지금 나타났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다면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여기서 살아가는가.

   
▲ 조은경 재한조선족작가협회 이사

'천진시절'에서 정숙이나 미스 신, 춘란의 욕망은 상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드러난다. 쌍둥이 동생을 둔 정숙에게는 희철과의 사랑보다 경제적인 문제가 더 시급하다. 미스 신이나 춘란은 젊은 조선족 여성이라는 ‘존재적 가치’로서 경제적·계층적 욕망을 실현한다. 상아에게는 경제적 궁핍이 정숙처럼 크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상아의 연애와 탈향과정이 다소 피동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진다. 상아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타의에 의해 선택한 삶이 지니고 있는 불안함을 감지할 수 있다.

상아는 그럴듯한 고백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무군과 사귀게 되며, 천진으로 떠나기 전에는 등 떠밀리듯 약혼식까지 한다. 상아는 억울함을 느끼기만 할뿐 대놓고 거부의 뜻을 밝히지도 않는데, 아마 그녀의 ‘천진시절’이 ‘천진한’ 시절로 규정된다면 바로 이러한 수동적인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상아는 왜, 누구 때문에 천진으로 갔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겠다.

상아가 천진으로 간 것은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살고 싶은 욕심에서이다. 이 때문에 상아는 무군이 이끄는 대로, 엄마가 약혼을 추진하는 대로, 무군의 누나가 일자리와 숙소를 배치해주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기만 한다. 이미 자신을 여자 친구로 생각하며 같이 천진으로 갈 것이라 확신하는 무군 앞에서 상아는 잠깐 고민의 시간을 가지지만 자신이 무군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무군과 같이 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천진에서의 삶은 예상과는 빗나가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혼생활’까지 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상아가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알겠으나 왜 꼭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약혼까지 해가면서 함께 떠나야 했는가. 무군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상아는 아예 고향을 떠날 수조차 없는가. 이렇게 무군을 ‘도구’로 삼아 떠난 상아의 천진행은 잡음이 없을 리가 없다.

상아는 살림살이를 하나둘 갖추면서 결혼을 꿈꾸는 무군의 독단적인 언행에 의문을 품긴 하지만 아무런 이견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무군이나 희철처럼 현실의 소소한 일상에 만족하며 ‘계층적·경제적 야망이 없이 살아가는 남자에게는 미래가 없을’것이라 확신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속물적이든 비도덕적이든 그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춘란을 보면서 상아는 자신의 욕망에 따른 주체적인 선택은 그 사람을 당당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인지한다. 겨울에 홀로 집으로 돌아온 상아는 자신의 한자이름을 고치는데 이로써 그녀의 ‘진짜’ 삶이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인가. 한국에 일하러 간 남편과 떨어져 살며 독박육아를 하는 상아의 삶이 불행해보이진 않는다.

소설을 읽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상해에서 만난 상아와 정숙이 연인을 배신했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일종의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삶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을 감당할 자세가 되여 있는 그녀들의 현재가 결코 초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천진시절'에 등장하는 ‘상아(嫦娥)’는 고향을 떠났거나 언제든 현재의 자리에서 이탈하려 하는 수많은 사람들 이름의 집합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 각각의 ‘상아’들이 자신의 이름을 온전하게 지켜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해묵은 탈향서사’가 소설의 옷을 입고 지금 다시 나타난 것은 삶에 있어 주체적인 선택이 어떤 그래프를 그려나가는가 하는 문제가 언제나 유효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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