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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마네현 ‘죽도의 날’에 즈음하여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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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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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미 /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

일본 시마네현은 매년 2월 22일에 100여 년전(1905년) 일본 내각 결의에 따라 ‘죽도’로 명명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것을 기념하는 ‘죽도의 날’ 기념 행사를 개최한다. 행사는 2006년부터 시작되었고 올해에는 16회 ‘죽도의 날’ 행사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 편입은 불법이다. 일본이 독도를 편입했을 당시 명백히 한국의 영토였음을 말해주는 사료는 많다. 몇 가지 핵심적인 사료를 통해 일본의 독도 편입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인은 독도를 독도(獨島)라 쓰고, 일본의 독도 영지설은 전혀 근거 없다

독도가 편입될 당시 독도가 어느 나라 섬에 속했는지 살펴보자. 1904년 9월 일본 전함 니타카호 항해일지에는 “울릉도에서 ‘리앙쿠르 섬(독도)’을 직접 본 사람으로부터 들은 정보, 한국인은 이 섬을 ‘독도(獨島)라고 쓰고 우리나라 사람(일본)은 ‘량코도’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독도는 당시 울릉도 사람들이 ‘직접 보고’ ‘다니고’ ‘독도라는 이름을 부여’한 섬이었다.

또 1906년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서 내용을 통해 살펴보자. 1906년 시마네현이 새로 편입한 영토 ‘죽도’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시찰단이 독도 시찰 후 울릉도에 들러 심흥택을 만났다. 심흥택은 “본군 소속 독도가 울릉도에서 100여리 떨어진 바다에 있는데” 4월에 시찰단이 와서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어 시찰차 왔다”는 말을 했다고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에게 보고했다. 이명래는 다시 그 내용을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에게 보고했고, 박제순은 “독도영지설(獨島領地說)은 전혀 근거가 없으니 그 섬의 형편과 일본인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다시 조사 보고할 것.”이라는 지령을 내렸다.

   
▲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의 지령.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나카이 요자부로도 ‘량코도’를 조선의 영토로 알았다

일본 내각이 독도 편입을 결의한 근거는 나카이 요자부로라는 시마네현 오키 섬 출신 사업가의 ‘량코도 영토 편입 및 임대 신청서’에 있다. 잠수기(潛水器)를 이용하여 해삼과 전복 등을 포획하는 어업을 경영하던 그는 1903년 경 독도 강치에 주목하고 독점적 강치 어업권 확보를 획책하게 되었다. 이에 1904년 9월 29일 ‘량코도 영토 편입 및 임대 신청서’를 내무성에 제출했고 러시아와 전쟁 중이던 일본 정부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각의 결정을 했다.

그런데 1906년 시마네현의 ‘죽도’시찰단의 일원이었던 오쿠하라 헤키운이 쓴 <죽도 경영자 나카이 요자부로 입지전>에 의하면, 나카이는 처음에 ‘량코도’를 조선의 영토로 알고 조선 정부에 임대 신청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리하여 동향 사람의 소개로 수산국장과 해군 수로부장을 만나 상의했는데 이들은 “독도의 소속은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일본 방향으로 십 리가 가깝고, 일본인이 이 섬의 경영에 종사하는 자가 있는 이상 일본령으로 편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일본 정부에 편입 신청을 할 것을 권했다. 그 끝에 나카이는 조선 정부가 아닌 일본 정부에 편입 신청서를 낸 것이다.

■편입 후에야 일본 국민은 독도의 존재에 대해 알았다

편입 전 독도는 주로 시마네나 오키섬 또는 그 주변 지역 사람들이 알던 섬이었다. 이 지역적 존재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동해 해전 때문이다. 도고 헤이하치로의 연합 함대가 1905년 5월 27~28일 양일간 울릉도와 독도 부근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전멸시킨 동해 해전의 승전보는 관보나 신문기사를 통해 곧바로 일본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독도의 존재가 전 국민에게 알려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리앙코루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5월 29일자 관보 중 ‘동해 해전 속보’에서는 “연합함대 주력함대는 27일 이래 패잔 적함에 대해 계속 추격하여 28일 ‘리앙코루도’ 암 부근에서 적함 ‘니콜라이’ 제1세...로 구성된 일군(一群)과 만나 공격하였더니”라고 알렸고, 5월 30일자 관보에서는“연합함대의 대부분은 앞서 전보한 것 같이 지난 28일 오후 ‘리앙코루도’ 암 부근에서 패잔적함의 주력함대를 포위 공격하여”라고 알렸다.

이 ‘리앙코루도 암’이라는 명칭은 3개월이 지난 후에야 정정된다. 6월 5일자 관보 정정(訂正)은 “지난 달 29일 관보 호외 본란 동해 해전 전보 항목 3 및 동 30일 동해 해전 속보의 항목 5중 ‘리앙코루도’를 모두 ‘죽도’로 정정한다”고 한 것이다. 이때에 일본 국민은 동해에 리앙코르도 암이라는 섬이 있고 일본 정부가 ‘죽도’라는 이름으로 편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1905년 6월 5일자 관보 정정(訂正), <지학잡지 제17년 제200권> ‘오키국 죽도 관한 구기(舊記)’(왼쪽 사진부터).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학계에서는 새로 편입한 ‘죽도(독도)’를 울릉도로 인식했다

한편 학계에서는 1930년대 까지도 새로 편입한 ‘죽도(독도)’를 울릉도로 알고 있었다. 오쿠하라 헤키운은 1906년 독도 시찰 후 <죽도연혁고>라는 책을 집필하여 시찰단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는데 “많은 사람들이 새로 편입한 ‘죽도(독도)’를 울릉도로 알고 있으나 이 섬은 옛 기록에서 보이는 송도(독도)이며 오키 섬 사람들이 량코도라고 부르는 섬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오쿠하라의 지적과 같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새로 편입한 ‘죽도(독도)’를 울릉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동경지학협회 간행 <지학잡지>에 1905년 8월부터 10월까지 실린 다나카 아카마로의 논문에서 다나카는 ‘죽도(독도)’를 울릉도로 기술하고 있고, 이 점은 그 다음 해인 6월호에 가서야 정정된다. 이 외 무라오카 료스케의 <일본지리자료>, 요시다 도고 <대일본지명사서>, <소요 신보> 등이 ‘죽도(독도)’를 울릉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이란 이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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