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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의 흔적, 삼청동과 북악산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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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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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 서원대 교수

   
 

지난달 25일 육상 강국 케냐의 엘리우드 킵초게 선수가 2022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했다. 2시간1분9초. 경악할 만한 기록이다. 2018년 9월25일에 2시간1분39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운 킵초게였는데, 불과 4년 만에 30초를 당긴 것이다. 42.195㎞를 어떻게 2시간에 뛸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1시간대 진입도 시간문제라는 기대가 나온다. 그 주인공 또한 킵초케일 것이란 예측이 많다.

   
 

마라톤은 1896년 근대 올림픽과 함께 스포츠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어 1908년 런던올림픽 때부터 42.195㎞로 거리가 정해졌다. 우리에게도 위대한 마라톤 시대가 있었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그날 식민지 청년 손기정(위 사진)과 남승룡이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했다. 당시 손기정의 기록은 2시간29분19초2. 올림픽 신기록이었다. 손기정은 이미 1935년 올림픽 예선에서 2시간26분42초로 세계신기록을 세운 바 있다.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양정고보 시절 손기정 선수가 청와대 주변 북악산을 오르내리며 연습을 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잖아도 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을 읽어보려던 참이었는데, 그 지인은 고맙게도 손기정 자서전의 한 대목을 복사해 보내주었다.

“이른 새벽마다 더운 김을 뿜어내며 가까운 삼청동 골짜기를 타고 북악산정까지 뛰어올랐다. 그렇게 큰 산은 아니지만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면 가슴으로 등으로 땀이 흘러내리고 숨이 턱에 닿는 듯했다. 경성 도성을 에워싼 돌벽이 산등성으로 이어져 있었다.…학교에서 일과가 끝나면 또다시 원남동 로타리를 돌아 창경원(지금의 창경궁) 돌담을 끼고 큰 길을 달렸다.…주머니를 기워 모래를 넣고 쏟아지지 않게 봉한 다음 다리에 달아매고 달리는 것이었다. 훈련의 강도가 엄청나게 높아졌다.…원남동 찻길을 혼자 달리던 내 꼴이 사람들에겐 신기하고 바보스럽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삼청동에서 북악산 꼭대기까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삼청공원 쪽이나 헌법재판소장 공관 주변에서 북악산 청운대까지 뛰어올라간 것이 틀림없다. 그쪽이 한양도성과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요즘 청와대 개방 덕분에 등산객이 많이 몰리는 곳, 그 언저리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훈련을 한 사람은 손기정뿐만 아니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신기록(2시간25분39초)으로 우승한 서윤복도 “가슴이 터질 테면 터져보라는 듯…정릉 골짜기에서 삼청공원으로, 북악산 꼭대기로 뛰어오르며” 체력을 길렀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우승자인 함기용도 손기정의 지도로 삼청동에서 북악산 꼭대기를 오르내리며 훈련을 했다고 한다.

신의주 출신의 손기정은 마라톤 하나만을 위해 20세의 늦은 나이에 양정고보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손기정은 달리고 또 달렸고 결국 올림픽 우승을 일궈냈다. 그 손기정의 마라톤을 우리는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베를린 올림픽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의 사진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1936년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진으로 기억할 것이다. 서울 만리동의 손기정기념관에서 그 영광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고, 50년이 지난 후 베를린 올림픽 우승 부상으로 뒤늦게 받은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를 보면서 손기정을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의 자리에 삼청동~북악산의 비탈진 산길과 원남동~창경궁의 돌담길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그 힘들었던 시절, 손기정·서윤복·함기용 등 젊은 마라토너들은 삼청동~북악산 정상 사이의 비탈길에서 숱한 땀방울을 흘렸다. 그 땀방울이 모여 한국 마라톤의 전성기를 꽃피웠다. 금메달과 세계신기록의 산실이 된 것이다. 우리 근대 스포츠에서 이보다 더 멋진 공간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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