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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선 위에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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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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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한국 언론에 거의 매일 등장하는 트로트가 도대체 무슨 음악 장르에 속하는지 한번 검색해 보았다. 일본에 들를 때면 가끔 보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엔카(演歌) 비슷한 대중가요가 아닌가 하면서 찾아보니 곡목이 조금 특이한 ‘평행선’이 눈에 띄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흥겨운 발라드였다. “나는 나밖에 모르고/ 너는 너밖에 모르고/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길을 걷지 평행선/ 나는 나밖에 몰랐지/ 너는 너밖에 몰랐지”로 시작하는 가사 내용도 간단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좋은 결실을 보지 못한 상태를 묘사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1980년대부터 사회학에서 많은 논쟁을 낳았던 ‘평행사회’를 떠올렸다. 서유럽국가들이 일반적으로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 문제로 심한 사회적 갈등을 겪는 가운데 등장한 개념이다. 특히 이슬람 문화권에서 건너와 세대를 넘기면서 서유럽에 사는 이주민의 사회가 논쟁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들이 주류사회의 생활세계가 요구하는 이른바 ‘주도문화’와의 통합보다는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안주하는 데서 오는 긴장과 갈등이 테러리즘의 온상도 되었다고 보았다. 이 시각은 당연히 다양성을 강조하는 ‘다문화’라는 개념도 강하게 비판했다.

이렇게 평행선을 그으며 서로 다른 생활세계를 보여주는 양상들을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확인하게 된다. 유럽에서처럼 이주민의 생활세계가 이의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같은 시대에 같은 삶의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마치 서로가 다른 행성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특히 언론매체가 그렇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중요한 사건을 한 편에서는 아주 크게 다루는데 다른 편에서는 없었던 것처럼 아예 다루지도 않거나, 설사 다룬다고 해도 의도적으로 이를 왜곡한다. 사설과 칼럼의 내용도 같은 사건이지만,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지를 의심할 정도로 전혀 서로 다른 사회적 메시지를 내놓기 때문이다.

이른바 진영논리가 낳는 심각한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최근 들어 특별히 시선을 끄는 사례로 한 건설노동자의 분신 사건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문제가 떠오른다. 노조활동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에 익숙해지다 보니 1970년 11월에 일어났던 전태일 분신 사건을 연상시키는 양회동 건설노동자 분신 사건도 ‘기획’된 것으로까지 보려는 반인륜적인 언론매체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노동쟁의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대응이 오히려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사회다.

사회적 자본 통해 갈등 치유 모색

국민의 80% 이상이 우려하고 반대하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후쿠시마 ‘괴담’이 만들어 낸 결과로만 몰고 가는 기사, 칼럼과 사설도 쏟아지고 있다.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여전히 갈리고 있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언론매체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리 전달된다.

사회 성원 간의 서로 다른 의견이 교차점 없이 평행선을 그리면서 달리는 사회는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끼리만 모여 사는 일종의 ‘동호인 사회’다. 바로 이 점에서 공공성을 규정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힘으로서 정치는 실종되고 그 자리에 분절화된 개인과 집단이 그릇된 정보나 선동에 쉽게 휩쓸리는, 부정적인 의미의 ‘정체성 정치’가 들어서게 된다.

사회 성원들을 유기적으로 서로 결속시키는 요소는 기본적으로 정치와 경제다. 국가의 통치 권력과 시장을 매개로 한 경제활동은 이의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사회성원 간의 신뢰와 유대감, 호혜의 규범이 없다면 그런 정치나 경제활동도 안정된 상태에서 지속할 수 없다.

연구자와 연구 대상인 사회에 따라 공통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지만,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개념이 바로 ‘사회적 자본’이다.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서 구성되는 사회의 구조와 이를 유지하는 작동방식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가 있다. 그는 물질적인 경제적 자본과 주로 교육과 지적 능력과 연관된 문화적 자본에 이어 어떤 집단 속에 지속해서 몸을 담은 성원이 얻는 자산으로서 사회적 자본을 추가했다.

이론적으로 사회적 자본도 다른 두 자본처럼 독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적 자본은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 자본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나타나며 경제적, 문화적 자본이 낳은 불평등을 대부분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회적 자본에 대한 이런 비판적 견해는 프랑스 사회의 특이하고 견고한 엘리트 집단을 염두에 두었다. 대부분이 전통적인 부르주아 배경을 지닌 젊은이들이 특정한 엘리트 교육을 거쳐 상호신뢰의 강한 연계망을 구축해서 정치와 경제의 핵심부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엘리트의 동종교배식 자가 충원이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비판도 거셌다. 1945년에 창립되었다가 2021년 말에 폐쇄된, 프랑스의 고위관리를 양성했던 국립행정학교(ENA)가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과 달리 개인주의나 초(超))개인주의로 말미암은 한 사회 통합능력의 저하나 상실에 대처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처방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자본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로버트 퍼트넘을 포함한 미국의 공동체주의자들은 대체로 공화주의 전통의 시민사회와 공동체의 연대성을 사회적 자본의 기본 내용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 자본을 개인의 자산으로 보는 부르디외와 달리 집단의 자산으로 보려 한다.

사회적 자본과 관련된 많은 실증적 연구는 주로 이 후자의 사회적 자본을 염두에 두면서 공동체의 위기와 이의 치유에 관심을 둔다. 한국의 사회과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많은 갈등의 양상은 사회 성원이 함께 지녀야 할 공동 규범이나 상호신뢰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을 낳는다. 세계 10대 무역국에다가 ‘G8(주요 8개국)’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을 들게 하는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이게 나라냐’라는 자조와 냉소 섞인 질문이 그렇다.

평행선도 발상 바꾸면 만날 가능성

지난 대선 득표율에서 겨우 0.73%포인트 차이로 신승한 정권이기에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만큼이나 큰 반대 세력의 존재를 의식하고 이들과 평행선을 그으며 앞으로 치닫기보다는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게다가 ‘검찰 공화국’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은 기득권자들의 엄청난 비판을 감수하고 프랑스의 정치와 경제계의 화려한 등용문이었던, 자신이 졸업한 학교 문까지 닫았다. 어떤 특정한 집단이 갖는 사회적 자본이 주로 내적인 신뢰와 호혜를 바탕으로 한, 마피아 같은 비밀결사 조직체를 낳을 수도 있다.

내부적으로 결속력과 통합력이 강한 사회나 조직은 대체로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다. 이는 평행사회 안에서 사는 이주민도 그렇지만 혈연, 지연과 학연의 질긴 연결망 속에서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처지도 비슷하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영남과 호남으로 갈라지고, 금수저와 흙수저가 다투고, ‘토착 왜구’와 ‘종북 빨갱이’가 싸우는 평행사회 속에서 끼리끼리 쌓아 올린 높은 장벽을 허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정글 북>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이 남긴 ‘동양과 서양의 발라드’라는 시가 있다. 지독한 인종주의자, 식민주의자였던 그가 제2차 영·일 동맹의 결성을 맞아 1905년 10월에 발표한 이 시는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 절대 서로 만날 수 없을지니/ 천지가 하나님의 위대한 심판의 옥좌에 설 때까지도 그러리라/ 그러나 동서양에도 국경, 인종, 계급도 없으리라/ 세계의 끝에서 온 두 강자가 서로 만날 때면”으로 시작하고, 같은 구절로 끝난다. 철저한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그도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유색인의 제국주의와도 만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평행선이 만날 수 있다는 주장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공간 속 도형의 성질을 밝히는 기하학마저도 만나는 평행선을 이야기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평면 위의 두 직선은 결코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전제하는 굽은 공간에서는 만난다. 거의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평행선 위를 서로 각각 질주하는 우리 삶의 양식도 발상 자체를 바꾸면 언젠가는 서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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