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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中의 위협 요소’라며 조선 독립과 개혁 막아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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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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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최근 정치권과 언론에서 느닷없이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 이름이 오르내렸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한국의 제1당 대표 앞에서 한국 정부의 외교 정책을 거칠게 비판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나는 일단 ‘위안스카이가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많이 알려져 있었나?’ 하고 놀랐다. 하긴 요즘 메이지유신 주역 중 한 명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이름도 술술 대는 일반인들을 자주 본다.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한국 시민들의 인식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거 같아 반갑다

20대 중반 中관리, 조선 내정 간섭

   
▲ 1880년대 서울에 부임해 내정간섭에 앞장섰던 20대 중반 시절 위안스카이의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린 김에 위안스카이와 그를 둘러싼 당시 한중일 정세를 한번 살펴보자. 전근대 조선과 중국은 조공책봉 관계였다. 이게 독립과 종속밖에 모르는 근대인의 개념에서 보면 참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인데, 긴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일단 중국은 조선에 군대와 관리(외교관)를 상주시키지 않았다. 정기적인 조공사절단과 그보다 훨씬 빈도수가 적은 칙사 파견이 사실상 관계의 전부여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는 조선 국왕이 자유롭게 했다. 형식상 대등한 관계지만 서울 한복판에 군대와 대사관을 두고 한국 내정에 깊이 개입했던 해방 후 한미 관계와 비교해 볼 일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1882년 발발한 임오군란으로 뒤집혔다. 대원군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청은 병자호란(1637년) 이후 처음으로 군대를 파견했고, 관리를 상주시켰다. 이때부터 청은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주역이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20대 청년 위안스카이였다.

   
 

위안스카이는 과거에 연거푸 낙방한 후 임오군란 때 오장경(吳長慶) 부대를 따라 23세의 나이로 조선에 왔다. 갑신정변(1884년) 때 김옥균 세력을 전격적으로 진압한 것도 그였다. 그 후 잠시 귀국했다가 임오군란 당시 청으로 잡혀 갔던 흥선대원군을 데리고 1885년 다시 나타났다. 그해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으로 일본은 사실상 조선에서 손을 떼었다.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이홍장(李鴻章)에게 청이 주도권을 쥐고 조선 내정을 개혁해 달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청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에 임명된 위안스카이의 독판이 펼쳐졌다. 실제로 그는 명함에 통감(統監)을 의미하는 ‘Resident’를 박아 넣고 다녔다.

걷지 않고 가마 타고 대궐 들어가

   
▲ 1888년 1월 17일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박정양 조선 초대 주미 공사 일행을 그린 삽화. 위안스카이는 박정양의 주미 공사 파견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사진 출처 하퍼스 위클리

위안스카이는 서양이 조선에서 세력을 갖기 전에 “고위 관원을 특별히 파견하여 감국(監國)을 설치하고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면서 내치와 외교를 모두 대신 처리하고자 한다면, 지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 조선은 류큐나 베트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다른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한다면 중국이 어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간청하건대, 먼저 증기선 군함 십수 척과 육군 수천 명을 파견하여 남의 나라에 앞서 주둔시켜야 합니다”(‘원세개전집1·袁世凱全集1’)라며 조선 내정 개입을 앞장서 주장했다. 조선 정부와 조선 주재 외국 공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청국의 일개 공사에 불과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사라는 직함을 한사코 거부했고, 다른 나라 공사와 다른 특별대우를 강요했다. 청이 ‘공사(公使)’라는 명칭을 수용한 것은 1899년에나 가서였다. 외국 공사는 대궐 문 앞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지만 그는 가마 타고 들어가기를 고집했다. 이번 ‘싱하이밍 사건’도 그가 스스로를 여느 대사와 동렬이라고 생각했다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 19세기 말 청이 조선에 설치해 운영한 전신선. 청은 조선의 독립 움직임을 봉쇄하려 전신선 회수 요구를 묵살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위안스카이의 내정 간섭에 대해서는 러시아와 밀약을 시도했던 고종을 폐위하려 했던 사건, 그리고 1887년 박정양의 주미 공사 파견을 집요하게 방해한 일 등이 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최근 나온 서울대 김형종 교수의 연구(‘19세기 한중관계사론’)에 의거해 다른 문제를 살펴보자. 먼저 전신선 설치 문제다. 청은 갑신정변 후인 1885년 조선에 차관을 제공해 서로전선(西路電線·의주∼인천선)을 가설하기 시작했다. 이어 한성∼인천 간 전신선과 경부·원산선도 청이 설치하고 운영했다. 조선은 서로전선 회수를 요구했지만 묵살당했고, 북로전선(北路電線·한성∼함흥선) 설치를 시도했으나 청의 거부로 1891년에나 실현되었다. 남로전선(南路電線·한성∼부산선)도 조선 정부가 가설하려고 시도했으나 청이 장악해 버렸다. 당시 전신선의 장악이 군사·외교·안보에서 갖는 중요성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선의 정보 중추신경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전신선뿐 아니라 세관 장악, 다른 외국과의 차관 교섭 방해, 화폐 주조 개입 등으로 청과 위안스카이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봉쇄했다.

독립하려는 조선, 군림하려는 청

청에서 독립하려는 조선과 그런 조선을 찍어 누르려는 위안스카이 간의 갈등은 1890년 승하한 신정왕후 조대비(神貞王后趙大妃) 조문 문제를 두고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들은 함께 모여 조문 방식에 대해 의논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조선과 청의 관계는 특수하다며 이를 거부하고 따로 입궁하여 조문하려 했지만, 조선 조정에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는 다른 수를 들고나왔다. 당시 조대비 승하 소식을 알리러 베이징에 간 조선 사신(고부사·告訃使)은 청의 조문 사절을 사양하며 부의(賻儀)만 받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전통대로 조문 칙사를 파견하면, 조선 국왕은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고두(叩頭)의 예로 영접해야 했다. 이미 독립 의식을 갖게 된 조선 조정은 이를 피하기 위해 굳이 칙사 파견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사대질서 회복의 기회라고 생각한 위안스카이는 칙사 파견을 강행했다. 20세기를 불과 10년 앞둔 시점에 벌어진 일이다. 하는 수 없이 칙사를 맞이하며 고두례(叩頭禮)를 행한 고종,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조선 백성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김형종 교수는 “(위안스카이는) ‘속국’ 조선의 조정 위에 군림하면서, 상관 이홍장의 지시와 후원 아래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조선을 감시·억압하고, 그 이익을 훼손시키면서 청의 국익을 일방적으로 앞세우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또한 조선이 국제법적으로 사실상 청의 속국임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의 의지를 꺾고자 하였다”고 평가했다. 적어도 청일전쟁(1894년) 때까지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방해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청과 위안스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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