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 기자]

▲ 도쿄 이치가야형무소 터의 형사자위령탑

▲ 형사자위령탑 옆에 있는 쓰레기 집하장.

지난 8월 15일 일본에서 만난 한인 동포들은 “우리가 하루빨리 추모 대책을 마련해야 할 유적지 두 곳이 있다”며 모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한인 동포들이 특별히 기억해야 할 유적지로 꼽은 곳은 이봉창 의사가 순국한 이치가야형무소 터와 올해 100주년을 맞이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추도비 자리. 특히 이봉창 의사가 순국한 이치가야형무소 터에 대해서는 “한번 가보면 가슴이 아플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일왕 행렬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했다. 그 한 해 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간 그는 김구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전하고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했고 이봉창 의사는 같은해 10월 10일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불과 32살이었다.

지난 8월 16일 오전 찾아간 도쿄 신주쿠 이치가야형무소 터는 현재 어린이놀이터로 사용되고 있었다. 본래 그 자리에 있던 이치가야형무소는 1937년 도쿄 스가모형무소로 이전해 터만 남았었는데 지금 놀이터로 바뀐 것이다. 이치가야형무소는 이봉창 의사가 순국했을 뿐 아니라 박열 의사, 김지섭 의사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옥중 투쟁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그런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지난 1964년 일본변호사연합회가 놀이터 귀퉁이에 세워놓은 ‘형사자위령탑(刑死者慰靈塔)’에 새겨진 글귀만이 이곳이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려주고 있다. 위령탑 옆에는 훨씬 작은 규모로 ‘민족독립투사추모비’가 따로 세워져 있는데, 지난 7월 18일 이곳을 찾은 한국 고등학생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운동가들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이곳은 온라인 등에 ‘도쿄 독립운동 유적지를 소개해달라’는 글이 올라오면 ‘꼭 가보라’고 소개되는 곳이다. 이날 하루 전 광복절을 맞이해 한인 동포들이 이곳을 찾은 흔적은 남아 있었다. 위령탑 비석 앞에 세상을 뜬 독립운동가들을 위로하듯 한국 소주 몇 병이 놓여 있었다.

이곳을 다녀간 한국 관광객들은 두 번 놀라기 마련이다. 일단 너무나 초라한 현장에 놀라고, 그나마 하나 있는 위령탑이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사실에 놀라면서도 씁쓸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서 온라인 블로그 등에 이런저런 감상을 적어 놓는데 그중 간혹 눈에 띄는 내용이 “다행히 쓰레기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반응 역시 이곳을 직접 찾으면 쉽게 이해된다.

공교롭게도 위령탑은 동네 쓰레기 집하장과 붙어 있었다. 가끔 위령탑 옆에 쓰레기더미가 잔뜩 쌓여 있기도 하는데, 한국인이라면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들은 “몹쓸 광경을 보지 않으려면 아침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남긴다. 오전 8~9시경 이곳을 찾으면 주민들이 쌓아 놓은 쓰레기를 청소차가 치우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한국인으로서는 잊어서는 안 되는 항일 저항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지만 사실 일본인 입장에서 이곳을 기념할 이유는 없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당시 일본 법에 따라 처벌된 이들을 추모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버젓이 쓰레기를 쌓아 놓을 수 있는 이유다.

쓰레기에 묻히는 초라한 공간이지만 온라인 등을 통해 이곳 사정이 알려지면서 이치가야형무소 터를 찾는 한국인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위령탑 바로 옆에 한국 학생들이 세워놓은 ‘민족독립투사 추모비’ 역시 최근 이어진 발걸음이 낳은 결과물로 보인다. 이 추모비에는 “고귀한 삶을 바쳐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시고 이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신 모든 우리 투사들의 뜻을 기립니다”고 적혀 있다.

광복절 다음 날 찾아간 두 번째 유적지는 도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이다. 1923년 9월 1일 최소 6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관동대지진은 아직까지도 피해규모 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그나마 세워진 추도비도 일본 피해자들을 기념하는 시설 옆에 초라하게 마련되어 있어 그곳을 찾는 한국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공원에는 관동대지진 피해자 약 5만8000명의 납골을 안치하기 위해 1930년에 건립한 위령당이 있다. 이 위령당에는 도쿄대공습 희생자까지 포함해 약 16만3000명의 유골이 안치되었다. 도쿄대공습은 1945년 3월 10일 미군이 도쿄에 대량의 소이탄을 투하해 1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우리로서는 잊을 수 없는 역사다.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을 합해 10만5000명이 사망·실종하고 건물 10만9000채가 무너지고 21만2000채가 불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 7.9의 강진이 도쿄를 덮치자 일본 재향군인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자경단(自警團)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군대·경찰의 묵인하에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조선인 희생자를 6661명으로 추산했다. 계엄령에 의해 군대와 경찰에게 구속된 도쿄 부근 한인만 1만5000명에 달했다. 자경단이 조선인을 죽창과 몽둥이로 무차별 학살해 많은 조선인들이 사망한 이 사건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피해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인을 학살한 군대, 경찰, 자경단원들은 증거불충분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1922년 이곳에 있던 육군피복창이 이전하면서 1930년 9월 요코아미초 공원은 도립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 피복창 터로 피난했으나 운반된 가재도구에 불이 붙고 때마침 불어온 강풍에 불이 번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숨졌다.

▲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추도비.

관동대지진 100년 맞은 추도비

1973년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 세워진 ‘조선인희생자추도비’ 앞에서는 매년 9월 1일 학살당한 조선인 추도식이 5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추도비에는 “이 역사 영원히 잊지 않고 재일 조선인과 굳게 손을 맞잡고 일조 친선 아시아 평화를 이루자”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잘못된 책동과 유언비어로 6000여명의 조선인이 귀한 생명을 빼앗겼다”고도 적혀 있어 일본 측도 학살을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6년까지 도쿄도지사가 매년 9월 1일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낸 이유다. 하지만 2017년 이후 고이케 유리코 현 도쿄 도지사는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있다. 전체 관동대지진 희생자 추도문을 보냈기 때문에 조선인 희생자들에게 따로 추도문을 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8월 18일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가 이곳 추도비를 찾아 헌화하며 참배했다. 윤 대사는 관동대지진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한국과 일본이 미래 지향적 관계로 나아가려면 역사를 직시하고 화해와 치유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했다고 대사관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