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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고려인마을, 항일무장투쟁 이끈 김경천 장군 연보 발간
강혜민 기자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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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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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천 장군(오른쪽)과 아내 유정화 [사진 광주 고려인마을 ]

광주 고려인마을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김경천 장군의 연보를 정리해 발간했다고 27일 밝혔다.

김 장군의 연보는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이 수년간 작업해 정리했으며, 국내 최초 성과라고 고려인마을은 설명했다.

고려인마을은 오늘 30일 오후 2시 특별전 및 기념세미나를 열어 김 장군의 애국정신을 계승할 예정이다.

연보에 따르면 김 장군은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 서문 밖에서 부친 김정우와 모친 윤옥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목흑기병 제일연대부에 재직하며 혼인을 치렀다.

31세였던 1919년 휴가를 얻어 서울 사저로 돌아온 김 장군은 3·1운동에 참여했다. 유럽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6일 비밀리에 서울을 떠난 그는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해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1921년 수청고려의병대 총사령관에 오른 김 장군은 러시아 적백내전에 참전, 고려인과 러시아인 연합부대의 총사령관도 맡아 일본의 지원을 받는 백군을 상대로 전쟁을 지휘했다.

1934년 고려사범대학교 초청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그는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1936년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돼 2년 반을 복역하고 석방된 그는 강제 이주를 당한 가족을 찾아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한다.

석방 한 달 만인 1939년 4월 다시 체포돼 간첩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김 장군은 철도건설공사장에 동원되는 수용소 생활 끝에 1942년 1월 14일 5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사후에 열린 재심에서 모스크바 군사재판소 등은 잇달아 무죄를 심판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8월 15일 김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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