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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정책 장기 플랜 세울 컨트롤타워, 더 늦출 수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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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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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칼럼니스트

고려인 이주 물꼬 튼 제천시
전북지사, 외국인 비자 연장 권한
이민정책 수립 가늠자 될 수도
산업·분야별 정밀 계획 세워야

   
 

지난 20일 의림지·청풍호·한방축제로 유명한 충북 제천시를 찾았다. 나타·마리아·홈 베이커리…. 한글과 키릴문자가 병기된 간판을 내건 식당·제과점·식료품점이 눈길을 끈다.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즐기는 소시지·치즈·만두 같은 식재료를 팔거나 양꼬치·보르쉬(러시아 스프)·고기 파이 등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이다.

이국적 풍경이 생겨난 건 지난해 10월. 고려인 동포 이주·정착의 첫 사업으로 24가구 57명이 둥지를 틀며 고려인 커뮤니티가 생겨나면서다. 구한말~일제 강점기 고국을 떠나 옛소련 일대로 이주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

제천에 새 보금자리 튼 고려인 57명

   
▲ 제천시 이주 고려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을 김창규 시장(왼쪽)이 돌아보고 있다. [사진 제천시]

제천의 고려인들은 ▶일시 거주가 아닌 정착을 목적으로 ▶가족 단위로 이주했다는 게 특징이다. 4년 동안 살며 ▶한국어 등 소양 요건과 ▶소득 요건(연봉 2900만원 이상)을 갖추면 영주권(F5)을 취득할 수 있다. 영주권은 선거권을 포함, 내국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보장한다. 사실상 이민이다. 고려인 이주 사업은 제천시가 지난해 ‘지역특화형 비자 사업자’가 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지역특화형 비자는 일정 요건을 갖춘 외국인에게 취업을 조건으로 특례비자를 발급해 주는 제도다.

제천시는 정부 발표 89곳에 해당하는 인구 감소 지역이다. 청년들은 떠나고 산업단지·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인구 절벽의 위기를 고려인 동포 이주로 극복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건 아제르바이잔·키르기스스탄 대사를 지낸 김창규(국민의힘) 시장이다. 1993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관 근무 경험에 착안했다. 김 시장은 “당시 옛소련 붕괴로 고려인 보호를 위한 당국의 지원이 모두 끊겨 고려인 동포사회가 해체 위기에 놓였다. 문 닫을 위기에 처한 동포 신문·방송 등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 정부의 예산 지원을 끌어내고 민간 기업의 후원금을 모금하는 일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인이 굉장히 우수하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또 “고려인은 같은 언어를 쓰고 동질한 문화를 갖고 있어 이질감이 크지 않기 때문에 유럽 국가와 같은 이민 실패의 부작용을 겪지 않고 이민이 잘 정착될 수 있다”고 했다.

57명의 고려인은 취업(산업단지 근무가 대부분)과 주거지 마련, 자녀 양육, 의료 복지 시스템 구축이 모두 끝난 상태다. 제천시와 시 부설 재외동포지원센터 직원들의 헌신적 노력 때문에 빠른 정착이 가능했다. 임정호 미래전략팀장은 “은행 계좌, 핸드폰 개설부터 주택 임대계약이나 자녀 입학, 장보기까지 직원들이 1대1로 도우미 역할을 했다”며 “현재 임시로 대원대 기숙사에 머무는 9세대 19명도 취업과 자녀 입학 절차가 마무리되면 곧 정착이 완료될 것”이라고 전했다.

“손주 낳으면 4대가 한국에 살게 돼”

고려인들은 이주 생활에 만족하고 있을까. 시내 청전동 주택가에 문을 연 ‘홈 베이커리’를 찾았다. 여주인 김 옥사나(36)는 어머니와 남동생, 두 자녀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그는 “유치원생인 딸이 체조에 소질이 있다”며 “국가대표급의 훌륭한 체조선수로 키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남편과 함께 식료품점 ‘나타’를 운영하는 남 발렌티나(45)는 “딸이 임신 중인데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와 사위, 손주까지 모두 4대가 한국에 살게 된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들은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했는데, 제천살이에 대해 대체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재외동포지원센터에서 통역 주임으로 일하는 김 야나(48)는 “사할린 동포신문에 실린 제천시의 이주 모집 광고를 보고 딸(초등학생)과 함께 오게 됐다”며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너희는 러시아 사람 아니고 한국 사람이다’는 얘기를 듣고 자라서인지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제천시는 올해 추가로 300명, 향후 3년간 1000명까지 고려인 이주를 추진할 계획이다. 사업의 성패 여부가 대한민국의 이민정책 수립에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이 실험이 주목받는 이유다.

“박사 따고도 취업 안 돼 해외로”

   
▲ 전북특별자치도가 운영하는 ‘결혼이민자 365 언니 멘토단’. 한국 정착과 국적 획득 과정을 멘토들이 돕고 있다. [사진 전북특별자치도]

올 1월 특별자치도가 된 전라북도도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작년 10월, 김관영(민주당) 전북지사와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외국인 산업인력의 비자 연장 권한을 사실상 도지사가 가질 수 있게 업무 협약을 맺으면서 탄력이 붙었다. 외국인 이주 근로자는 비자 기한(5년)이 지나면 연장이 불가능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산업현장에서 안정적 노동력 공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구 감소를 부채질하고 있다. 도내에선 고창군·김제시·남원시 등 10개 시·군이 인구 감소지역이다. 김 지사는 “비자 규정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일할 만 하면 돌아가니까 기업들 애로가 많다”며 “성실하게 일하는 우수 인력은 비자를 연장해서 일할 수 있게 도지사가 명단을 건의하면 법무부 출입국관리소가 연장을 허가해 주도록 협력을 맺어 전북도의 기업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시적(3년)이지만 도지사에게 비자 연장 권한을 준 건 전북을 미래 인구정책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하려는 심모원려다. 국가적으로 그간 300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은 2015년 1.24명에서 2022년 0.78명으로 오히려 떨어지는 악순환에 직면해 있다. 인구절벽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그러려면 ▶산업 부문별 과학적인 수요 예측으로 인력 수급 계획을 세우고 ▶내국인이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역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정밀한 시스템 구축이 필수적이다. 김 지사는 “지방대 공대의 경우 석·박사 과정 절반이 외국인 학생들인데, 졸업 후 국내에서 취직이 되지 않거나 취업이 돼도 짧은 기간만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우수 인력이 미국이나 일본 등지로 빠져나간다”며 “IT나 제조업 분야의 고급 인력이 지역에 정착해 자녀 낳고 살면 영주권과 국적 획득까지 가능하도록 돕는 이민 프로세스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후발 이민자 국적 획득 돕는 멘토단

외국인 이민 정착이 가능하려면 자녀 양육과 경제적 자립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부모 양쪽 혹은 한쪽의 한국어 능력이 필수적이다. 전북도는 지난해 결혼 이민의 국적 취득을 위한 조례를 제정한데 이어 국적 취득에 필요한 한국어 교육과 모의 면접, 행정 절차 안내를 1대 1로 돕는 국적취득반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국적을 취득한 결혼 이민자(선주민)가 멘토가 돼 새로 온 이민자들의 국적 취득을 도와주는 ‘결혼이민자 365 언니 멘토단’도 지난해 발족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대1 만남(1시간30분)을 통해 국적 취득과 정착에 필요한 세부 사항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80명의 멘토단이 240명의 멘티를 돕는 활동을 벌였다. 김문강 가족다문화팀장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핸드폰 앱을 통해 수준별 한국어 음성 교재를 개발했고, 국적 취득 면접시험을 위한 기출문제도 녹음 교재로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저출산 스페인, 이민 받아 인구 늘어

저출생과 가파른 인구 감소는 발등의 불이다. 어린이집부터 대학원까지 각급 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폐교나 축소 운영이 불가피한 형편이다. 기업은 필요한 노동력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생산 차질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제품을 소비할 수요 시장의 축소로 산업 생태계 기반이 위협받고 있다.

미국은 물론 영국·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은 출산율 높이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외국인 이민 유입을 통해 적정 인구 수를 유지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우리와 인구 규모가 비슷한 스페인을 보자. 외신 보도에 따르면, EU 내에서 몰타(1.13) 다음으로 출산율이 낮은 스페인(1.19)은 2023년 출생아 수가 32만2075명을 기록, 10년 만에 25%가 감소했다. 그러나 600만 명가량의 외국 이민자를 받아들여 총인구는 1.26%(4860명) 증가했다.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은 이민청 신설을 한목소리로 주장해 왔다. 다문화 인구는 불어나는데 이를 다루는 부처는 법무부·외교부·행정안전부·여성가족부 등으로 분산돼 있어 컨트롤 타워가 절실하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은 2020년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법무부도 지난해 이민청 설립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21대 국회에선 논의에도 착수하지 못한 채 표류했다.

무책임한 국회와 달리 광역 시·도와 기초단체들은 절실하다. “이민정책에 대한 장기적 계획을 세울 컨트롤타워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김관영 전북지사)는 목소리가 높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일선 담당자들은 “주거와 정착 목적으로 입국하려는 외국인에 대해 외교부와 법무부가 협력해 행정 절차만 간소화해 줘도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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