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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한인사회의 태동과 좌충우돌 -(하)
박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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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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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태 / 베이징 화지아대학교 겸임교수]

뉴질랜드의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은 다민족, 다문화라는 환경 하에서 서로 상대방의 관습과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한 환경에서나마 한인 동포들은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거시적이고도 구체화된 방법을 모색한다. 드디어 1989년부터 한국을 알릴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다.

오클랜드대학교(University of Auckland) 아시아 학부의 아시아 어문학과에 개설된 한국학 강좌다.

   
 

개설 당시 과목으로는, 한국어 과목과 한국문화 과목 등 2과목뿐이었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한국을 알린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문화사회에서 사회문화적 감수성을 높이고 융화적인 측면에서 역동적인 한국을 알리고자 다양한 실천 방안이 논의·도출되었다.

그 결과, 대학 내에서 영어 자막을 넣은 한국 영화를 상영함은 물론, 한국학 국제학술회의를 열기로 했다.
이렇듯 뉴질랜드에서 사회문화적·학문적 접근으로 한국을 알리고자 하는 뿌리는 3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1994년부터 뉴질랜드의 일부 초·중·고등학교에 한국어를 보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1993년에 설립된 한국학프로그램(The Korean Studies Programme)의 일환이었는데, 한국재단(The Korea Foundation)과 두산그룹의 지원 하에 이뤄졌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소개되었으며 1997년부터는 교육부 주관으로 ‘Korean Language Project’가 시작돼 1999년까지 지속되었다.

3년 동안 오클랜드 지역의 14개 학교에서 7~8명의 한국인 교사와 70~80명의 현지인 교사가 연계하여 한 해에 2400~280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쳤다.

이런 프로젝트의 시행으로 한국에 대한 인지도·관심도가 급격히 상승되었다.

1994년과 1995년에 걸쳐 7561명의 한국인이 뉴질랜드 영주권을 받았다.
뉴질랜드로의 이민이 가장 활기를 띤 시기였다. 이 시기는 대만, 홍콩 등에서도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들기시작해, 다양한 아시아 문화가 꽃 피우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의 주류 문화는 서구 문화다. 그럼에도 아시아를 중요시한다. 그 이유로는 지리적으로 태평양 권역에 속해 있다는 점, 유럽이 지역 공동체를 설립해 지역 이기주의화 된 점, 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및 무역 비중이 크다는 점 등으로 인해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증대될 수밖에 없었으며 아시아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6년 후인, 1995년에 오클랜드 대학에서 ‘뉴질랜드 아시아 연구소(The New Zealand Asia Institute)’가 설립되었다. 그 부속기관으로 한국학 연구소, 중국학 연구소, 일본학 연구소도 동시에 개설되었다. 당시 한국은 6대 무역 상대국이었다.

뉴질랜드의 6대 수출 국가를 점유율 순으로 보면, 호주, 미국, 일본, 중국, 영국, 한국 순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한국은 비영어권 국가 중에서 3대 수출 상대국이기에 한국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오클랜드 지역에는 동포의 60%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염원은 오클랜드에 영사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웰링턴에 소재한 대사관에서 오클랜드로 순회영사업무가 시행돼 왔지만 무역 통상, 자국민 보호, 외국인 대상 민원 업무, 문화교류 증진 등의 수요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96년 3월1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부친인 김홍조 옹과 그 일행이 4박5일 동안 뉴질랜드를 관광차 방문했다.

오클랜드 한인회에서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뉴질랜드협의회 자문위원 및 한인 언론사 대표들과 회동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때 오클랜드 동포들의 염원이 담긴 서신을 전달했다.

약 7개월 후인 1996년 10월16일. 초대 총영사로 김상훈 총영사가 부임하였다. 그해 12월17일에 오클랜드 Queen St.350번지에서 200여명의 한인 동포와 뉴질랜드 정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한국대사관 오클랜드 분관 개관 행사를 가졌다.

개관식 축사에서 ‘레스 밀스(Les Mills)’ 오클랜드 시장은 뉴질랜드에서 한국의 경제적 공헌을 치하하고 ‘서로 돕는 양국 간의 우정을 창출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1년 후 불어닥친 고국의 IMF 금융위기 사태로 인해 분관이 폐쇄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동포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라 뉴질랜드에도 순수 한인 금융기관의 설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는 동포들이 동포 은행을 성장시키고, 동포 은행은 동포들의 경제적 지원·기반을 탄탄하게 받쳐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994년 4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회 참석 차 당시 홍재형 경제부총리가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동포들은 한인 금융기관의 설치를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설치에 따른 잇점으로 한국과의 효과적인 송금, 무역거래의 활성화, 동포들에 대한 금융 지원 등을 피력했다.

1997년 9월29일. 드디어 오클랜드 ASB센터에 국민은행이 오픈했다. 이는 국민은행의 국외 점포망 중 아홉 번째 개설이었다. 오클랜드의 동포 수가 약 1만8000명에 불과했지만 동포 사회의 성장성 등을 감안한 결과였다.

1997년 한국의 IMF 사태가 일어나기 전만 해도 뉴질랜드로의 한국인 이민, 유학, 관광 붐은 가파른 상승세였다.

오클랜드와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매년 열린 한인의 날 행사에는 태극기와 한복이 큰 물결을 만들어 냄으로써 키위(뉴질랜드 현지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동포들에게는 한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의 표출이었다.

1997년 겨울. 한국의 IMF사태는 뉴질랜드 동포들의 경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붐을 이루던 한국인 관광객·유학생이 더 이상 유입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한국과 뉴질랜드를 왕복 운항하던 에어뉴질랜드(Air New Zealand)도 운항을 중단해 버렸다. 페업하는 업소가 속출해 동포들은 일정 기간 경기침체의 국면을 맞이해야 했다.

1999년 9월11일. 김대중 대통령이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총회 참석 차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이때 한국 경제는 IMF에서 벗어나 순항하던 때였다. 그 해 9월14일, 200여 명의 한인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 대통령과의 간담회가 있었다.

대통령은 참석한 동포들에게 간절한 부탁을 했다. ‘자녀들을 1등 한국계 뉴질랜드인으로 키워달라’, ‘한국인의 위상을 정립함은 물론, 자랑스러운 한국계 뉴질랜드인으로 뿌리내리라’고 당부했다. 가슴뭉클한 순간이었다.

2001년 들어 큰 변화의 물결이 몰려왔다. 뉴질랜드 정부에서 장기 사업 비자(Long Term Business Visa)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3년 간 합당한 사업계획서와 3년 간의 생활자금을 입증하는 서류를 제출하여 비자를 발급받으면 뉴질랜드 내에서 사업을 하되, 영어능력이 필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3년 동안 자녀 교육을 뉴질랜드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와 같은 차원에서 교육시킨다는 점이 돋보였다. 장기사업비자 제도가 시행된 이래, 2006년 3월까지 1631 한국인 가정이 비자를 획득했는데, 이는 뉴질랜드에서 다른 민족에 비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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