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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鄭進) 在日大韓民國民團 中央本部 團長
이민호 기자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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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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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한일강제병합. 이 사건은 한민족이 일본 땅에 살게 된 역사의 시발점이다. 오랜 세월 재일동포사회의 구심 역할을 담당해온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에게도 2010년이란 해는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민단은 오는 11월 25일 서울에서 '강제병합 100년, 조국과 함께 한 민단 65년'을 주제로 대규모 심포지엄을 열 예정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민단 중앙본부의 정진(鄭進) 단장을 긴급 인터뷰했다.     
                                                                       
 이민호/통일일보 서울지사장

- 創團 64年 民團, 鄭 團長 個人이 걸어온 길 ‘眞率 告白’ 
- 政府支援金 75%削減 編成은 “左派政權 10年 때에도 없던 일”
- 對日請求權賠償 1億 달러 在日同胞 配定分마저 포기하며 도왔던 祖國


內國人보다 徹底한 民團의 國民儀禮

   
▲ 재일민단 부인회 연찬회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 정진 단장과 여옥선 회장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한국 국민들로선 매우 낯익은 행사 의식들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여덟 살 꼬마 때부터 익히니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내국인들은 워낙 익숙해서 그런지 이런 의식을 치를 때 ‘경건함’과 ‘진지함’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관청 주최 행사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만 하고 나머지는 생략해버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일본 땅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에게선 이런 얼렁뚱땅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기자가 재일동포 취재에 발을 들여놓던 15년 전, 처음으로 목격한 민단의 행사풍경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참가자 전원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경례와 묵념을 하고, 애국가 제창 때는 또박또박 부르려고 애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단상(壇上)으로 향하는 사람은 먼저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고 올라갔고, 단상에서 내려갈 때도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댄 채 태극기에 인사를 했다. 개인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숱하게 치러본 낯익은 의식이었지만 민단의 그것은 특별해보였다. 진지하게 임하는 재일동포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저 습관적으로 익힌 시늉이 아니라 마음으로 우러난 행동이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재일동포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 민단이란 도대체 어떤 단체인가? 이들 다수는 일본에서 태어난 2세 3세로 일본에서 영주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말(한국어)마저 서툴다. 그러나 재일동포들의 민족을 향한 마음과 애국심은 국내외 어느 국민 어느 동포들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모순된 현상들로 비춰진다. 정 단장은 재일동포들이 광복절과 삼일절 기념행사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했는 데, 그 대목에서 재일동포의 인식을 엿볼 부분이 나온다.

“광복절과 삼일절 행사는 민단이 가장 신경을 쓰는 행사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한민족의 선조들이 나라 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분들이 계셨기에 조국인 대한민국이 탄생했고 우리 재일동포들도 일본 땅에서 한국인으로 어깨 펴고 살 수 있는 겁니다.”


8.15光復의 意味, “日本은 在日同胞에게도 謝過해야”


민단은 해마다 8.15광복절 행사를 도쿄(東京)의 히비야공회당(日比谷公會堂)에서 개최하는 데, 이 행사에는 재일동포들뿐 아니라 많은 일본의 여야 국회의원들과 각료들도 초청한다. 히비야공회당은 광복직후인 45년 10월 16일 재일조선인연맹의 결성대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장소다. 당시 재일동포들은 재일조선인연맹을 이념을 초월한 범민족 재일동포 단체로 만들었지만, 후일 이념 대립으로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과 북한 정권 편에 선 조총련으로 갈린다.

올 8월 일본정부는 광복절 직전 한국정부와 국민에 대해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의 반성과 사죄를 했다.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는 담화문을 내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痛切な反省と心からのおわびの氣持)”이라고 말했다. 특히 항일독립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3·1독립운동을 언급하고 “한국인들의 뜻에 반하는 식민지 지배”라며 강제성을 인정한 건 진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일본 총리의 사과문에는 재일동포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정 단장은 “잘못된 일”이라며 “일본이 진심으로 반성과 사과의 마음이 있다면 재일동포에 대해서도 ‘미안하다’고 하는 게 마땅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정 단장이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건, 재일동포들이 일본 땅에 정착하게 된 역사적인 인과관계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한민족의 해외이주사는 일본제국주의의 강제 국권 침탈 이른바 망국(亡國)에서 비롯됐다. 그 중 재일동포들은 점령국인 일본 땅에서 36년 식민기간동안 고스란히 일본인들로부터 직접적인 핍박과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 후 광복(光復)을 맞이했지만 ‘억압의 땅’ 일본에서의 한민족 핍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재일동포를 때로는 노골적으로 혹은 보이지 않게 차별을 가해왔고 마치 이등국민(二等國民)같은 취급을 해왔다. 광복절이 국내 일반인들에게 ‘가벼운 휴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풍조 속에서 재일동포들이 이를 소중히 여기는 건 오랜 세월 ‘나라 잃은 국민’으로서 설움을 겪었던 본인들의 아픔과 맞닿아 있다 할 것이다.

민단이 매년 광복절 기념식전을 히비야공회당에서 개최하는 건 창단 64년 동안 내려오는 전통이다. 민단 단원들은 식전이 끝나면 ‘대한독립만세’ 구호를 외친 뒤 피켓을 들고 주변 공원을 행진하는 데, 이런 재일동포들의 행위 속에는 자신들을 핍박해온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공회당 건너편에는 한 때 일제의 상징이었던 테이코쿠호텔(帝國호텔)이 서 있다. 이 호텔은 1923년 칸토대지진(關東大地震)이 도쿄를 덮쳤을 때 주변의 많은 건물들이 무너지고 화재에 휩싸였을 때 거의 원형을 유지했다고 한다. 일본제국의 지도자들은 이 호텔 대연회장에서 ‘조선을 먹었다’는 공개 메시지를 보낼 요량으로, 백두산에서 포획했다는 호랑이를 요리해 공동 시식회를 열기도 했다. 칸토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지진의 원인으로 한국인을 지목해 6000명 이상의 재일동포들을 죽창으로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民團 “國民의 團結”의 뜻 담아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700만 명의 해외한인(海外韓人)들, 5대양6대주 어느 나라에서든 ‘한인회’ 조직이 꾸려져 있는 데 재일동포 사회만이 한인회가 아닌 독특한 명칭인 ‘민단’을 쓰고 있다. 민단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 정 단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재일동포들의 역사적 특수성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한민족들은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잖아요. ‘민단’은 국민을 뜻하는 ‘민’과 단결을 뜻하는 ‘단’이 합쳐진 단어에요. 즉 국민의 단결이란 의미입니다. 일제 때는 민단 말고도 수 많은 ‘단’들이 생겼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만든 흥사단도 그중 하나였죠. 민단이란 명칭은 한민족으로 살아남겠다 그리고 조국 통일을 지향하자는 뜻을 품은 겁니다.”

민단은 1946년 10월 3일 창단 이래 명칭을 두 번 개칭했다. 처음에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다음달인 9월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에서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꿨다. 명칭속의 ‘거류(居留)’에는 ‘일시적으로 (일본에) 머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재일동포들은 언젠가 조국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란 귀국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1세의 시대가 저물고 주역들이 2세 3세로 내려가면서 일본에서 영주할 수 밖에 없게 된 현실을 묵과할 수 없는 법. 이런 시대적 흐름을 받아들인 민단은 1994년 규약 개정 때 ‘거류’자를 떼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탈바꿈한다. 또 재일동포의 개념을 국적 중심에서 민족 중심으로 바꿔서 흔히 귀화자로 불리는 일본국적 취득동포들과 한일국교수립 이래 일본으로 건너온 뉴커머(New Comer)들까지 단원으로 전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명칭 개칭 논의과정에서 일부 단원들이 다른 해외동포사회들처럼 ‘한인회’로 이름을 바꿔달자는 주장도 폈지만, 단원들은 압도적으로 ‘민단’이란 이름을 유지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재일동포들은 ‘민단’이란 명칭만큼 일본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재일동포 선배들이 이끌어온 ‘단결의 전통’을 계승할 이름은 없다고 봤던 것이다.


幼年時節 “모욕스런 조센진(朝鮮人) 놀림”

   
 
정 단장은 1937년 3월 나가노현(長野縣) 마츠모토(松本)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다. 마츠모토는 일본 북부의 작은 산골 도시지만 강제징용을 온 5000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일제는 산이 많은 이 도시의 지형을 활용해 후지(富士)중공업 등의 지하 군수공장을 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 단장은 광복을 맞이한 1945년 초등학교 3학년 때의 학교풍경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다니던 학교는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초기에 만들어진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였지요. 원래는 일본인들밖에 없던 학교였지만, 마을에 강제징용자들이 끌려오니까 한국학생들도 입학하게 된 것이지요. 한 클래스 65명 급우 가운데 10명 정도가 한국인들이었습니다. 창씨개명으로 이름은 일본명이었지만 누가 한국인이고 일본인인 지는 말 안해도 다 아는 사이였어요. 일본아이들이 우리가 지나가면 ‘조센진’(朝鮮人)이라고 수군거리는 데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일제 때 조센진이란 용어는 매우 상스런 욕으로 통했다. 정 단장은 조센진 소리를 들을 때마다 화가 치밀고 너무 창피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왜 조센진으로 낳았느냐?”고 대든 적도 있다고 했다.

“철이 없던 시절 제게 아버지는 숨기고만 싶은 대상이었어요. 1세 아저씨들이 결혼식 같은 집안행사에서 한국억양이 섞인 서툰 일본어로 손님들을 응대하는 모습을 볼 때면 「왜 되지도 않는 일본어를 쓰느냐」고 흉 본 적도 있습니다.”

6.25동란이 발발하던 1950년 중학교 2학년 때는 학교에서 ‘공산당원’으로 몰린 억울한 경험을 겪었다. 계기는 군인 출신의 교사가 수업시간에 갑자기 “어이 히가시모토(정 단장의 일본이름), 자네는 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물은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북쪽”이라 답한 게 화근이 돼 그 날 이후로 급우들은 그를 공산당원으로 낙인찍고 따돌렸다. 당시 나가노현 재일동포 사회는 남북간 사상적인 구분이 희미하던 시절, 동포들은 민단과 조총련 구분 없이 양쪽과 교제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


父親은 두터운 信望 받던 志士風의 氣品

그러나 정 단장은 후일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어가면서 자신이 학생시절 겪었던 멸시들과 1세인 아버지 세대들이 겪었던 온갖 수난들이 일본에 의한 민족 박해였음을 깨달았다. 정 단장은 주변에서 일어난 갖가지 억울한 일들이 일본의 악정에서 비롯됐으며 재일동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정 단장은 그동안 자기정체성(Identity)를 부정해온 자신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제 어리석음을 깨닫고 보니 아버지의 등이 그렇게 넓어 보일 수 없었습니다. 너무 죄송해서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겠더군요.”

정 단장의 아버지 고 정승모(鄭承謨)옹은 일제시대 중엽, 고향인 전라북도 부안을 떠나 시모노세키를 거쳐 마츠모토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광복을 맞을 무렵엔 다른 1세 동포들보다 비교적 경제 기반이 튼튼했고 일본어도 완벽한 편이었다고 한다. 사업가였지만 누가 보아도 지사(志士)풍의 기품에 리더십까지 갖추고 있어 주변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민단계 조총련계 관계없이 많은 동포들로부터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통했다. 광복 직후 정 단장 집은 날마다 대형급식소 같은 풍경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주리고 있는 동포들의 배를 채워주겠다며, 온 집안 식구들이 밥 짓는 데 매달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집을 찾아오는 동포들에게 무료 식사를 나눠줬기 때문이다. 이런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면서 자란 정 단장은 “어떤 일이든 남에게 절대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신념을 배웠고, 그걸 철칙처럼 지키며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韓國語 배운 契機 ‘첫 歸國 때의 入管과의 싸움’

그러나 일본에서 꿋꿋하게 일어나 한국인으로 거듭난 그였지만 젊은 시절 조국 대한민국은 그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안겨줬다. 정 단장은 기대감에 부풀며 당도한 첫 한국 방문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출입국관리소(入管) 직원으로부터 “이 반쪽발이야, 왜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느냐”는 핀잔을 듣고 한바탕 말싸움을 벌였다.

“고압적인 정부직원으로부터 ‘반쪽발이’ 소리를 들으니 화가 치밀대요. 일본에서 조센진 소리에 그토록 치를 떨었는 데 왜 조국인 한국에 와서 차별을 받아야 하는 지... 한국어로는 싸울 자신이 없어 일본어로 「너희들 역사가 나쁘니까 우리(재일동포)들이 일본서 죽을 고생을 하는 것이야. 다 식민지로 만든 니네 책임인 거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요.”

이 때 정 단장은 화를 내는 한편으로 속으로는 한국인임에도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하는 자신을 꾸짖고 있었다. 큰 벽처럼 다가왔지만 첫 조국 행은 스스로에게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라는 계시처럼 느껴졌다.

   
▲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정진 단장 (오른쪽 두번째)
어느덧 일본 이주 역사가 100년을 넘어선 현재, 재일동포 사회의 최대 현안은 민족교육이며 그중에서도 한국어 교육이 가장 긴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한국계 민족학교가 일본 전역에 4개 밖에 없는 현실에서 한국어를 배울 기회를 얻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만큼 힘든 일이다. 민단의 중앙단장까지 오른 그이지만 여느 재일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일본어 학교만을 다녀야 했다. 민족교육은 아버지와 주변 동포들, 스스로 민족운동에 뛰어들어 몸으로 부닥치며 익혔다.

그런데 그 나름 열심히 갈고 닦은 한국어였지만, 정 단장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핸디캡은 다름아닌 그의 한국어 실력이다. “일본어로는 뭐든 말할 수 있는 데 우리말은 아무래도 많이 힘들죠”라며 허허 웃는 정 단장. 하지만 기자가 접해본 그의 한국어 실력은 본인이나 옆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평가와는 달랐다. 일상 회화에서는 거의 걸리는 게 없을 정도로 자유롭게 말하고, 전문 영역만 아니라면 시사토론도 가능한 수준이다. 다만 발음이나 표현이 다소 서툴러 ‘못하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한국어로 농담도 곧잘 건넬 줄 아는 정 단장을 두고 '모국어 못하는 단장'이라 부르는 건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75%削減된 支援金 “左派政權 10年 때도 없던 일”

한편 몇 년 전부터 해외동포 사회에서는 민단에 대한 정부 지원금 삭감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가 2011년도 민단에 대한 지원금을 금년 대비 4분의1 수준으로 삭감 편성, 이래저래 민단 지원금 문제는 국내외에서 화제의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2008년부터 유지돼온 73억 원이 18억8500만원으로 급감한 것. 이는 예산 책정 시 전년도 집행액을 기준으로 플러스마이너스 10% 전후로 조정하는 관행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異例的)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된 일인 지 영문을 모르겠다”며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 정 단장 곁에서 허맹도(許孟道) 부단장은 “10년 좌파 정권 때에도 없던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아직 국회의 예산 심의가 남아 있기 때문에 지원금이 정부안보다 인상될 여지는 남아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번 일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 확인된다. 삭감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예산편성 담당관의 단순한 행정착오라는 말들도 나왔지만, 이미 정부안이 국회에 제출된 마당에 진위여부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법.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수만은 없는 노릇인 것이다. 편성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짚어봐도 재외동포 주무부처인 외교통상부와 재외동포재단에서 이미 금년 대비 25.6% 삭감된 채로 지식경제부에 보고됐고, 마지막으로 정부의 예산안을 정하는 지식경제부는 75%삭감 결정을 냈다. 통상 주무부처가 예산안을 책정해 예산담당부처로 올리면 두 부처가 조율하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올해는 그게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거나 뭔가 문제가 발생한 셈이다.

사실 민단 지원금에 대한 논란은 어제 오늘 있었던 일이 아니다. 다른 재외동포 사회와의 형평성, 한인회 조직에게 가는 지원금으로는 과도하다는 식의 비판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최근엔 정부가 슬로건으로 내건 ‘공정 사회의 프레임 정착’에 맞추려면 민단 지원금을 깎아 다른 동포사회에 배분해야 한다는 논리도 등장했다.


鄭進 體制 民團, 豫算 46% 民族敎育에 執行

하지만 일본의 민단은 타국의 한인회 조직과는 그 역할과 규모면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현재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고 있는 민단 중앙본부는 최대 역점 사업으로 민족정체성 고양 및 차세대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중에서도 정 단장이 취임 이래 가장 신경을 쓰는 파트는 한국어의 보급 및 육성이다. 이를 위해 정진 체제의 민단은 전국의 조직을 적극 활용해 토요어린이학교(30개 지역)와 한국어교실(147개 지역, 524개 클래스)을 운영 중이며, 일본인들에게도 한국어교실을 개방해 한류(韓流) 확산 기여에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정 단장이 취임한 이래 최근 5개년간(2006~2010년) 민단 중앙본부가 집행한 사업비 내역을 살펴보면, 전체 사업비에서 민족정체성 고양 및 차세대 육성 사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46%에 달한다. 민족정체성의 중요성에 대해 정 단장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 재일동포사회는 일본 국적 취득자가 연간 8000명에 달하고, 일본인과의 국제결혼 비율이 90%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재일동포 사회의 구조가 전환기를 맞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런 상황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을 우리 한민족으로 붙들 방법이 많지가 않아요. 민족교육 시설만 해도 턱 없이 부족하니까요. 그래서 우리 민단이 전국조직망을 총 동원해 토요어린이학교와 한국어교실을 열고 있는 겁니다. 그래야 한 명의 차세대라도 더 한국어를 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일각에서는 한인회가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민단은 사업비와 경상경비를 단원들이 내는 단비와 동포 경제인들이 내는 후원금만으로 100% 충당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민단이 꾸려가고 있는 조직 체제와 업무의 성격을 파악하고 나면 단순히 친목을 나누는 조직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體系化된 民團, 政府 役割까지 擔當

현재 민단은 일본전국에 중앙본부를 정점으로 49개 지방본부와 290개의 지부를 두고 있는 데, 이처럼 조직적인 정비가 갖춰진 한인회는 세계에서 민단이 유일하다. 전 세계적으로 확대해봐도 민단만큼 체계를 갖추면서도 대형화된 해외동포 조직은 찾아보기 드물다. 민단은 창단 이래 이런 전국적인 조직 기반을 바탕으로 정부가 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해냈다.

특히 일본내에서의 재일동포 지위향상 및 민족차별 철폐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친 결과, 지금까지 약 260개의 일본 법률에서 국적조항을 없애는 성과를 거뒀다. 현재 민단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본내 지방참정권 획득운동 역시 권리 획득운동의 일환이다.

정부가 담당해야 할 공공 부문의 역할을 대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민단이 2003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탈북자지원센터의 경우, 일본에 정착하는 탈북자들을 서포트하고 일본의 재일동포 및 탈북자 정책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민단은 탈북자들이 일본의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에스코트를 하고, 생활 정착금 및 의료 지원, 취업 알선, 일본어 교육 등 사회 적응을 도와주고 각종 행정 수속을 대행해주고 있다.

한편 민단이 2007년 7월부터 운영을 시작한 생활상담센터는 상사 주재원과 유학생 등 새롭게 일본에 정착하는 한국 동포들의 불편을 돕고 있다. 또 일본 전국의 민단 네트워크를 활용해 각 지방조직마다 한국인 여행자 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런 역할들은 한국 정부와 공관의 행정력을 상당 부분 커버하고 있는 증표들이다. 또한 연 평균 220만 명이상의 우리 국민들이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감안하면 정부의 재외국민 보호 의무를 대리하고 있는 면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在日同胞와 民團이 9個 駐日韓國公館 寄贈

   
▲ '일본속의 한국 땅'이 되다-1961년 8월 15일 서갑호 씨가 박정희 의장에게 본인 소유의 주일대표부 건물과 부지를 국가재산으로 써달라고 헌납하고 있다.
민단의 존재가치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은 재일동포들에게 조국을 향한 연결 고리로서 수 많은 일들을 수행해왔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재일동포들과 민단이 해낸 놀라운 일을 꼽자면 일본에 있는 공관들과 부지를 앞장서 기증해 왔다는 사실이다. 재일동포들이 조건 없이 기증한 주일공관은 도쿄 미나미아자부(日本國 東京都 港區 南麻布 1丁目)에 있는 주일본대한민국대사관을 비롯해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요코하마(橫浜), 고베(神戶), 후쿠오카(福岡), 센다이(仙台), 시모노세키(下關), 삿포로(札幌) 등 모두 9개소에 달한다. 이처럼 재일동포들은 자손에게 물려줄법한 귀한 자기 재산을 조국의 공관으로 기증했고, 이 과정에서 민단은 조직적으로 모금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같은 해외동포 사회의 움직임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일본 내 9개의 한국 공관은 재일동포들의 조국애(祖國愛)를 입증하는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參照記事-「民團의 ‘祖國 짝사랑’」]

정 단장은 재일동포들이 기증한 주일공관의 시가만 따져도 천문학적인 자산이 될 것 아니냐고 묻자 “재일동포 선배들의 조국을 향한 마음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답했다.


對日請求權 1億 달러 在日同胞分 祖國 爲해 抛棄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교섭 때 한국이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던 대일청구권자금 5억 달러 가운데 당초 재일동포 배정 분이 포함돼 있었으나, 민단에서 형편이 어려운 조국에게 양보하기로 했다고 한다. 정 단장도 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5억 달러중 1억 달러는 재일동포들에게 주는 배상금으로 할당돼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만해도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밥 먹기도 힘든 형편이었잖아요. 그래서 가난한 조국이 그 돈을 기반으로 잘 살 수만 있다면 재일동포들은 희생할 각오가 돼 있다 그러니 1억 달러는 조국에 양보하자고 결정했다고 그래요.”

당시 민단 집행부가 재일동포들에게 할당된 배상금을 자신들이 받지 않고 한국으로 넘겨주기로 결정하자, 민단 내에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민단은 한일회담 협상 때도 숱한 반대 여론을 무릎 쓰면서 찬성 입장을 표명했는 데, 이 역시 오로지 조국의 발전만을 생각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자는 말한다. 스스로 설 힘이 없다면 그 조직은 무너지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하지만 이런 정글에서의 약육강식론(弱肉强食論)은 부모 자식 관계에서는 통할 수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둘의 관계는 최후까지 서로를 지켜주는 불가분의 관계다. 재일동포들은 지난 100년의 세월동안 어머니인 모국을 향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헌신해 왔다. 정부의 민단 지원금 문제는 어쩌면 부모의 자식을 향한 작은 관심으로 생각하면 별 것 아닌 일이 될 지 모른다. 집 나간 효자가 가난하고 힘들게 살던 부모를 봉양했으니, 자식에게 사랑을 베푸는 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鄭 團長이 말하는 ‘民團의 存在 理由’

정 단장 역시 집으로 돌아가면 아들 딸 6남매를 둔 평범한 가장이 된다. 자신의 회사에서 영업부장을 맡고 있는 장남 강행(剛幸,49)씨를 비롯한 모든 자녀가 결혼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식은 아무리 나이가 먹더라도 자식일 뿐, 그 또한 “늘 걱정스럽다”고 말하는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아버지였다.

지난 10월 3일로 창단 64주년을 맞이한 민단,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정 단장에게 민단의 존재 가치에 대해 물었다.

“과거 선배들이나 지금이나 민단 조직을 꾸리면서 한 번도 편한 환경에서 활동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민단은 재일동포들의 권익 옹호와 생활, 경제기반을 서포트해왔고, 어떻게 하면 ‘동포사회를 더 낫게 만들 것인가’ ‘일본을 차별 없는 세상으로 만들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운동해왔습니다. 그런 진정성이 있었기에 동포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일본 땅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별별 모함을 다 겪으면서도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꿋꿋이 지켜낸 조직이 바로 민단입니다. 민단이 있기에 ‘우리 재일동포들이 든든하다’ ‘한국에서 일본에 갓 오신 분들에게 안심이 된다’ 앞으로도 민단은 그런 한민족의 전진기지로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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