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저널(VOL. 1105) <시론> / 유창선 시사평론가 ]


예산안 강행 처리 과정에서 야당 의원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해 논란을 빚은 김성회 한나라당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했다고 공개했다. 예산안이 처리된 날 밤에 이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격려해주었고, 이에 김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밝혔다. 그날 여당 의원들이 했던 일이 격려까지 받아야 할 일이었는지, 그리고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이 어디까지인지를 묻게 만드는 장면이다.

김 의원이 전한 이 장면은 예산안 강행 처리에 나타난 여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청와대는 한나라당의 예산안 강행 처리에 개입한 바 없다고 밝혔지만, 한나라당이 속전속결식 예산안 처리라는 강수를 선택한 데에는 이대통령의 주문이 강력히 작용했음이 여러 정황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예산안 처리 이후 청와대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닌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한나라당 내에서 이어졌던 것도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여기서 이번 예산안 처리과정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문제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첫째, 이대통령의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촛불 정국 이후, 여당이 재⋅보선과 6⋅2지방선거에서 패배하자 청와대와 여당 내부에서는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에서 탈피해 소통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이번에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와대나 여당은 예산안 처리 법정 시한이 넘은 시점에서 법대로 한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를 이끌고 나가는 사람들에게서는 법보다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 정치이다. 연말까지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었고 예산안 협상이 파국을 맞은 것도 아니었는데, 굳이 그렇게 서두르며 ‘날치기’ 소리를 들어가며 밀어붙여야 했는지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결국 여당이 예산안을 강행 처리한 데에는 정치보다는 숫자의 힘을 통해 국정을 끌고 가려고 하던 기존의 국정 운영 방식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발견되는 고질적인 문제는 청와대만 따라가기에 급급한 여당 의원들의 역할이다. 야당과 어떻게든 협상을 계속할 것 같았던 여당은 청와대의 주문이 있자 일사분란하게 강경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예산안 강행 처리 후 여론이 악화되자 여당 내에서는 앞으로는 청와대 거수기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나오고 있지만, 이미 사태가 끝난 뒤의 얘기이다. 오죽 급하게 서둘렀으면 여당이 공약한 중점 사업, 서민들이 주시하는 서민 복지 예산들까지 대거 누락하는 우를 범했을까.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이 통과시킨 예산의 내역을 뒤늦게 알고서 당황하는 모습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민심이 악화되면 여당 내에서는 자성과 다짐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언제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이다. 더구나 외양간을 고치고서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데 국민들은 더욱 실망한다. 이렇듯 자기 쇄신의 기회를 번번이 놓쳐버렸을 때 어떤 정치적 결과가 올 건인지는 여당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