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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출생 노인의 한반도 귀환에 관한 기억
최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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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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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호 / 영산대학교 교수 ]


   
지난 9월 6일 필자는 부산광역시 남구 도서관에서 매주 열리고 있는 ‘실버 일본어통번역 봉사회’ 학습 모임에 처음으로 찾아갔다. 일본에서 출생하여 해방을 전후하여 한반도에 귀환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즉석에서 6명이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승낙하여 9월 25일부터 사흘간의 개별 면담 일정을 교섭했다. 결과적으로 이 가운데 한 명이 집안 일로 일정에서 벗어나게 되어 총 5명이 최종 확정되었으며 이들로부터 각각 과거 일본생활과 귀환과정에 관한 기억을 듣게 되었다.

조사일 첫날 점심시간에 만난 정(鄭) 할아버지는 1927년에 도쿄에서 태어났다. 경남 사천 출신의 부친은 1920년경에 도일하여 토목업 식당업 등을 영위하며 살았다. 어려서 여러 곳을 옮겨 살다가 후쿠시마현(福島縣)에서 가장 오래 거주했기 때문에 그는 일본 경험으로서 후쿠시마 생활이 가장 많이 기억된다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동포들이 적은 일본인 마을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하였고 모친이 한복만을 입고 지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사회에서 민족차별을 당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귀환 후에 그는 한반도에 살던 동포들이 오히려 일본사회보다 훨씬 심한 민족차별을 당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도쿄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1943년 3학년 때 후쿠시마에 소개(疏開)하기 위해 전학한 일이 있으며 이듬해 4학년 때에는 학도동원령이 내려 가와사키(川崎)의 진공관 제조공장에 동원된 일이 있고 도쿄 대공습을 체험하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 직후 1945년 4월 후쿠시마를 떠나 경기도 안양에 있는 항공기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귀환 길에 올랐다. 미군 공습으로 며칠간을 기다렸다가 하카타(博多) 항구에서 연락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귀환 직후의 부산에 대한 기억으로는 헐벗은 민둥산과 혼탁하고 가난한 모습만이 남았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들은 해방 후에 귀환했고 귀환한 부친은 조국해방을 정말 기뻐했다고 회고했다. 해방 후 그는 우리말을 익히기 위해 열심히 자습했고 삼천포에서 미군부대 통역사가 되면서 적산관리 업무 등을 통해 생활을 영위해 갔다. 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참화 가운데도 그는 남들에 비해 큰 곤란을 겪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조사일 첫날 오후에 만난 이(李) 할아버지는 1928년 가와사키에서 태어났다. 그도 어린 시절 비교적 거주 환경이 좋은 일본인 주택지에서 식료품 건어물 등을 판매하는 집안에서 유복하게 살았으며 소학교 시절에 반장을 맡기도 했다. 가와사키에 가난한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 있었고 거기에는 전기나 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다. 모친의 친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아주 형편없는 초라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던 지역은 깨끗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었고 무엇보다 일본인으로부터 전혀 민족차별을 당한 일이 없다고 기억했다. 1945년 3월경 공습을 피하여 친척이 있는 미야기현(宮城縣)으로 소개해 갔다. 그는 비교적 귀환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 패전 이후에도 계속 미야기현에서 지내다가 1946년 3월경에 조선인연맹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모친과 4명의 형제가 다함께 귀환했다. 열차로 하카타로 이동했고 거기서 커다란 선박을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하카타 항구나 부산 항구가 모두 질서정연했다고 한다. 다만 귀환 후에 흉년을 만나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울산으로 귀환하여 우리말을 비롯하여 공부를 계속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는 해방 후 정착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모친의 가르침 덕택이라고 했다.

조사일 둘째 날 점심 때 만난 이(李) 할아버지는 1932년 아타미(熱海)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4살 때부터 나고야(名古屋)에서 주욱 자랐기 때문에 그는 나고야에서의 생활만을 기억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심하게 민족차별을 받은 일은 없는데 주변의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모습은 많이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조선인을 차별하는 노래 하나를 기억한다고 하며 손수 메모를 했다. ......조선인은 넝마주이/ 하루에 5전/ 살림이 힘들어...... (朝鮮人は紙屑拾い/ 一日五銭/ 暮しに困る) 1944년 말에 그는 나고야를 덮친 공습으로 운송업을 하시던 부친을 잃었다. 공습이 계속되자 모친과 두 형제가 일본생활을 접고 귀환을 준비했다. 1945년 2월경 그가 아직 6학년에 재학 중인데도 불구하고 귀환 길에 나섰다. 나고야에서 열차로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했으나 귀환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7~8일을 노숙하며 선박을 기다렸다. 간신히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산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잠시 3식구 모두가 잠든 사이에 일본에서 들고 온 짐을 모두 도난당했다. 당시 부산은 가난과 무질서 세상이었다고 회고했다. 모친의 고향인 진주로 귀환하여 얼마동안 친척의 도움을 받아 지내다가 14살의 나이에 심부름꾼 등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귀환 직후 우리말을 몰라 독학으로 천자문을 통해 우리말 읽는 법을 익혔다. 진주에서 해방을 맞았으며 농업조합에 견습생으로 일한 후 밀양의 농협에 취직했다.

조사일 셋째 날 오전에 만난 최(崔) 할머니는 1930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5~6살 때 오사카에 이사하여 줄곧 지냈기 때문에 도쿄의 기억은 없고 오로지 오사카에 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삼천포 출신인 부친이 일본에 밀항하여 도쿄에서 일본생활을 시작했고 같은 고향의 모친과 결혼한 후 오사카로 이사했다고 한다. 부친은 토목 노무자 일을 했고 모친은 재봉 일을 하여 와카야마(和歌山)까지 물건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모친이 장사 끝내고 집에 돌아올 때 과일과 쌀을 구입해서 들고 왔다고 하며 어린 시절을 그런대로 유복하게 보냈다고 기억했다. 그녀는 1945년에 오사카 경찰서 내선계(內鮮系)에 취직해서 일하면서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오사카 집은 1칸 2층집으로 기와지붕이었고 일본인 마을에 위치했다. 일본인 학교를 다닌데다가 집 주변에 사는 조선인 동포 친구가 하나도 없어 친구라고는 일본인뿐이었다. 해방이 되자 1945년 12월 경 15명 정도의 가족과 친척이 밀선을 빌려 바다로 나갔다가 열차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이동했다. 이어 곧 바로 시모노세키에서는 정식 귀환 선박을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다. 시모노세키에 대한 기억은 없으며, 귀환 직후 부산에 대해서는 지저분한 거리, 움막집, 전기불 없는 초롱불 생활을 목격하고 “귀국한 것을 후회했다”고 회고했다. 일본에서 밀선에 실어 보낸 짐은 삼천포에서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조부모가 크게 농사일을 하고 있어 식량은 넉넉한 편이었다. 1947년에 유복한 집안에 시집을 가서 남편의 도움으로 편안하게 우리말을 공부할 수 있었다.

조사일 셋째 날 점심 대 만난 최(崔) 할머니는 1933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전남 고흥군 출신이며 부친은 일찍이 1920년대에 일본에 건너갔고 모친은 1932년에 들어갔다. 그녀가 5살 되던 해에 20살 위의 언니가 살고 있던 미에현(三重縣)으로 옮겨 언니 밑에서 자랐다. 그녀는 일본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보냈으며 일본인으로부터의 민족차별에 관한 기억은 없다고 했다. 1945년 3월 9일의 도쿄 공습으로 부친과 오빠 그리고 올케 언니를 잃었다. 모친도 그 후 미에현으로 옮겨와 함께 지내다가 그 해 11월경에 언니 식구와 함께 총 7명이 귀환 길에 올랐다. 욧카이치(四日市)에서 열차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이동하여 거기서 큰 배를 타고 부산항에 들어왔다. 시모노세키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 부산항에 도착해 보니 일본과 비교하여 형편없이 가난한 모습들이었다고 회고했다. 부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언니 가족은 시댁이 있는 군산으로 가고 그녀는 모친을 따라 고흥 근처의 순천으로 귀향하여 정착했다. 1951년에 일본에서 귀환한 남편과 결혼했다.

이상 5명의 일본 출생 노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5명 모두가 각각 거주지역과 생활환경이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출생하고 자라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린 시절에 민족차별을 그리 당하지않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5명 모두가 조선인 부락과 같은 차별 지역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이 총독부와 일본인에게 받았던 민족 차별과 억압에 비하면 일본인들과 부드럽게 융화되어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끌려 간 징용 피해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식민지 백성은 당시 일본인의 노예였다”고 진술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서는 일본의 패전에 따른 해방감이나 감격의 기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귀환 선박으로 도착한 부산이나 부산항의 모습에 대해서는 징용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모두 궁핍하고 무질서한 장소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한반도로 귀환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는 점에서 징용피해자들과는 달랐다. 정(鄭)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귀환 후 언어 소통이 곤란한데다가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견디기가 어려워서 몇 차례에 걸쳐 밀선으로 일본 재입국을 시도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부모의 고향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한반도는 마치 외국과 같은 장소로서 새로 적응해 가야 하는 곳이었다. 이들이 귀환 직후에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했던 과제는 우리말을 완전하게 익히는 일이었다. 5명 모두는 다행히 그다지 생활형편이 궁핍하지 않았고 일본에서 학습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우리말을 습득할 수 있었다. 결국 이들은 우리말 습득을 통해 이중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통역이나 교육 업무에 알맞은 경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징용 피해자들에 비해 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보다 나은 조건에서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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