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남 / 전 댈러스 한인상공인회장 ]

▲ 고(故) 안재호 선생

지난 19일(토) 새벽2시, 댈러스의 한인 의사(醫師) 안재호 선생이 영면했다.
안재호 선생은 3.1운동 한해 전인 1918년 2월 26일 경북 예천에서 순흥 안 씨 집안 (아버지 안태욱, 어머니 김성래) 26대손으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 치하, 백두대간 소백 산록의 작은 마을, 학문과 선비의 고장인 예천 땅에서 초등학교 50리길 통학도 마다않았으며 향학의 끈을 꼭 붙잡아 관비생으로 대구 사범학교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를 졸업했다. 해방 2년 후인 1947년 약관 20세로 평생의 업이 된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내과 전문의 (폐결핵)로 첫 직장인 국립 마산 결핵 요양원에 근무 중 1954년 2월 9일 한국 이민 2호로 도미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뉴욕 씨뷰 병원(Staten Island 소재) 레지던트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고, 얼마 후 곧 본인의 결핵 질환으로 오른쪽 폐를 잘라내는 큰 수술도 받았지만 수술 후 60여년을 더 살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고국과 동포 사회에 이민자의 귀감으로 올곧은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 주시다가 우리 곁을 떠났다.

안재호 선생은 항시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 은혜’라는 생각을 하시던 분이며, 감사하는 마음이 몸에 배여 살았던 생전의 모습은 지금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다. 의사로 일하셨던 그의 직장은 항상 결핵 환자를 돌보는 봉사자의 삶이었다. 국립마산결핵요양소와 뉴욕결핵요양소, 알칸사주의 결핵요양소 근무를 거쳐 1964년 텍사스 동부 타일러시에서 1986년까지 결핵 전문의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때 이미 슬하에는 3남 2녀(텍사스 주 의사 시험 감독관으로 명성을 떨치던 차녀 스쟌은 남매만을 남기고 2003년에 타계함)를 두었고 자녀 중 3명은 의사로, 다른 2명도 각기 화학과 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재호 선생은 얼마 전까지도 현역 의료인으로 댈러스 동포사회에서 활동하셨던 실력 있는 내과전문의였다. 1968년 타일러 시절에 시작한 고향땅 무료봉사활동은 1980년대 초반에 댈러스로 옮긴 후에도 지속되어 모두 25년간 격년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선생은 이 의료 봉사 외에도 고향의 시골 학교 돕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은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서 받았던 따뜻한 손길들을 잊을 길이 없어 의료 봉사와 장학 사업으로 고마운 마음에 보답했다.

선생의 의료 봉사는 주변의 미국 교회들과 자선 기관들, 동료 의사들의 아낌없는 성원으로 이루어졌다. 선한 사람들이 선생님의 뜻을 높게 여겨 도와준 아름다운 선행이었다.

안재호 선생은 학문적으로도 큰 족적을 남기신 분으로 전문 분야인 폐결핵 퇴치를 위해 꾸준히 연구하며 자료 정리하는 일에 정력을 쏟아 많은 연구 사례를 발표했는데 특히 1973년에 발표된 비정형 결핵 연구 보고(Geographic Distribution of Atypical Mycobacterium in Texas) 논문은 타일러시 인근에 널리 퍼져있던 결핵 환자들의 진료 내용을 연구해서 얻은 값진 결과물로 후일 교수로 재직했던 U.T. 타일러 의대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안재호 선생은 댈러스 지역 동포사회에서도 이곳 간호협회 회원들을 이끌고 매년 열성적으로 의료 봉사 활동에 힘을 쏟았다. 댈러스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선생의 행적은 동포 사회에서의 영호남 화합을 위한 노력을 들수 있다. 비록 선생은 경상도 토박이였지만 좁은 땅에서 영호남이 반목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겨 이곳 댈러스에서나마 영호남이 서로 어우러지며 화합하기를 원했다. 이런 그의 마음이 댈러스 호남향우회와의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고, 호남장학회 결성에도 적극적으로 도왔을 뿐만 아니라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군부 탄압에도 정신적으로 저항했다. 아마 이에 관해서는 댈러스에 오래 거주하신 많은 호남 분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일은 동포사회 정의에 대한 선생님의 확고하신 신념이다. 경제적 약자에 대한 동포사회 어른으로서의 마음가짐이나, 동포사회에 유입된 외부 조직 폭력배 척결을 위해 “범죄예방협의회”를 조직하는 한편 주류사회와도 긴밀히 접촉, 자칫 동포사회에 뿌리내릴 독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의 이 같은 동포사랑과 불의를 참지 못하시던 모습은 언제나 후학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선생의 90평생은 짧다면 짧은 날들이겠지만 돌이켜보면 의료 전문인으로 미국에서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을 뿐 아니라 빈곤에 찌든 당시의 고국 형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25년간 한결같이 봉사했으며 또 이곳 댈러스 동포사회의 화합과 범죄예방을 위해 항시 걱정하시던 생전의 모습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인지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타일러시 의회는 안재호 선생님의 아름다운 봉사를 기려 1985년 11월 17일을 ‘Doctor Ahn’s Day’ 를 선포했으며, 한국 정부에서도 1989년 5월 ‘국민 포장’을 수여했다.

댈러스 장로교 병원에서 맞은 선생님의 임종을 지켜본 가족들은 참으로 평온 중에서 눈을 감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우리는 의미 있는 선한 삶으로 한 시대를 사셨던 선생님 생전의 모습을 돌아보며 선생님의 서거 소식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는 누구도 거역 할 수 없는 그 길로 떠나신 선생님의 발자취를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찾게 될 뿐 아니라 선생님의 귀한 삶이 동포사회에서 보다 알찬 모두의 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길 소원한다.

사랑하는 안재호 선생의 명복을 기원하며, 삼가 후학이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