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석 / 한인유권자센터(KAVC) 상임이사 ]

▲ 김동석 KAVC 상임이사

뉴욕시청 광장에 한인 1만여 명이 모였다. 연단에는 뉴욕시장이 올라갔다. 흑인으로는 최초의 뉴욕시장이 된 ‘데이비드 딘킨스’ 시장 이다. 거의 10개월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는 한인청과업소 앞의 흑인 불법시위를 시장이 나서서 중단 시키라는 압력이다. 한인들의 결집된 힘과 설득으로 딘킨스 시장은 인종간의 화합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중단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집행 할 것을 뉴욕경찰에 지시했다.
한인 상점주인과 흑인 고객 간의 마찰이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 간 집단적인 충돌로 비화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이미 자마이카나 브루클린 지역에선 한인들이 백주 대낮에 흑인으로부터 이유 없이 린치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었다. 1990년 9월18일 일이다.

◆ 한⋅흑 갈등과 화해의 노력

뉴욕일원 흑인밀집지역에서 한인 상인들과 흑인 고객 간의 작은 갈등들은 1970년대 말부터 비일비재했다. 흑인 종업원을 해고하는 과정에서, 물건을 사러 온 흑인 고객과 가격 시비에서, 슬럼가의 흑인 불량배들의 절도행각…… 등등의 사건이 연일 발생했다.
과격한 흑인 민권단체들이 “악덕 상점 주인을 몰아내자!” 혹은 “돈만 아는 한인들!”, “Korean go home!” 등의 피켓시위가 주류 미디어에 종종 뉴스로 등장해 왔다.
1988년엔 일 년 내내 이러한 사건의 몸살을 알았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흑인사회와 접촉하는 한인사회의 움직임이 있었다. 12월5일 브루클린하이츠에 있는 브루클린한인교회(담임 안중식 목사)에서 한⋅흑 분규와 관련한 한⋅흑 교회 대표자들 50여명이 모여서 기도회와 세미나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필자도 회의 준비를 돕는 역으로 참가했었다>.
흑인대표자들은 한인업주들이 흑인종업원을 고용해 줄 것과 흑인계은행을 이용하고 지역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980년대 뉴욕한인사회는 한편으론 갈등이 발생하지만 한편에선 흑인커뮤니티와의 만남을 지속했기 때문에 극단의 순간은 피할 수가 있었다. 한인들이 집단적인 힘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뉴욕에서는 폭동발생 직전에 가까스로 수습이 되었다. 1991년 가을을 가슴 조아리며 이렇게 넘겼다.

◆ 4·29 왜 한인이 당했나

20년 전, 1992년. 개나리가 만개한 화창한 봄, 온 몸이 나른해지는 오후였다. 급보가 TV의 뉴스를 통해서 미전역에 방송되었다. 필자는 영화의 한 장면인줄 알았다. 검은 연기와 함께 붉은 불기둥들이 사방에서 치솟아 오른다. 거리에는 광분한 폭도들이 폭력과 약탈, 그리고 건물에 불을 지른다. 폭도들은 몽둥이와 흉기를 들고 사정없이 폭력을 휘두른다. 얻어맞고, 쫓겨 다니고, 땅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여기저기 길거리에 주저앉아서 통곡하는 사람들이 한인들이다.
공권력에 속수무책으로 내팽개쳐진, 한인들이 피와 땀으로 가꾸어 온 LA의 코리아타운이 삽시간에 공포의 도시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나흘 동안 무려 2,200여개의 한인업소가 피해를 입었다. 4억 달러 이상의 손실로 집계되었다. 시민(납세자)이 약탈당하고 공격당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공권력도 움직이질 않았다. 사후에도 마찬가지로 피해자는 있고 가해자가 없는 설명이 불가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매년 이맘때에 LA폭동을 생각하면 가슴이 더욱더 답답해 온다. 결코 보상받지 못한 물질적 정신적 피해 때문만이 아니다. 아직도 폭동의 원인을 인종갈등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흑 갈등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4·29 흑인폭동은 백인경찰들이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집단 구타하고, 대부분 백인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기소된 경찰을 무죄로 평결함으로써 발단된 것이다.
당시 ‘로드니 킹’ 재판의 판결에 성이 난 흑인들이 거리로 밀려나오자 미 주류 언론들은 준비해 두었던 ‘한⋅흑 인종갈등’이란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메이저 방송사들은 일 년이 훨씬 지난 ‘두순자씨 사건’과 뉴욕의 브루클린 사태를 보도했다. 미 언론들은 흑인동네에서 식품점을 운영하는 두순자씨가, 덩치가 2배나 더 커 보이는 흑인소녀에게 기절할 정도로 폭행당하는 장면은 다 빼버리고, 흑인소녀가 15세라는 것과 그녀가 총격 당하는 장면만을 보도했다. 폭동이 발생한 흑인지역에서 백인동네로 가려면 한인 타운을 지나야 한다. 백인에게 향하는 성난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 타운에서 터지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폭동 후 글줄이나 읽고 세상을 향해서 한마디 할만 한 사람이라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이해하고, 말하고 있다.

◆ 역사에서 지혜 찾아야

당시 한인과 흑인간의 갈등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인종갈등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피지배 소수계간의 일상에서 부딪히는 충돌인 것이다. 흑인계든, 중국계든, 한인이든, 유태계든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다인종 사회에선 늘 발생하는 일이다. 미국의 역사책을 두 장만 들추어봐도 이제까지 발생한 흑인들의 폭동은 백인들이 오랫동안 흑인을 차별해 왔기 때문에 그러한 원인으로 폭동이 발생했다.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인들은 한·흑 간에 잠재된 오해와 갈등의 원인을 해소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러나 당시 폭동의 불길이 인근 백인 주택가로 번지지 않도록 코리아타운을 방화벽으로 삼아 바리케이드만 쳐 놓고 폭도들의 만행을 구경만 했던, 그들은 그 책임에 대한 솔직한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정치력과 정치인의 몫이다.
4월29일은 재미한인들에겐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일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정치력을 결집시키는 일은 한인 스스로의 일이다. 매년 4월이 오면 그래서 ‘정치력신장’이란 말이 단골로 언급된다. 그런데 왜? 4·29폭동, 정치력신장의 일에는 늘 한산할까? 총영사관이 함께하는 3·1절 행사나 개천절 행사엔, 동포지도자들이 줄을 서는데 말이다. 답답한 가슴이 필자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