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석 /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 ]


부국강병을 외치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우선 국민들을 감정으로 무장시켰다. ‘굴복시켜 존중받는’ 논리는 영화배우 출신의 대통에게 더 없이 매혹적인 시나리오다. 대통령의 목소리는 조곤조곤 부드러웠지만 강한 미국을 부르짖는 그의 연출에 국민들은 결집되었다. 국방비증액이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는 여론이 있을 정도였다.
대통령 주변의 강경파들은 한술 더 떠서 우주전쟁을 구상했다. 세계 최강의 위치를 군사력으로 더욱 확고히 하려는 레이건 대통령에게 동아시아의 미군기지는 절대적이었다. 그가 필리핀의 마르코스나 한국의 전두환을 애지중지 한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미국 외의 사전에는 ‘민주주의’나 ‘인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레이건 이긴 외교위원장

1986년 필리핀 선거 감시단을 이끌고 선거현장을 다녀온 상원 외교위원장은 나날이 고민이었다. 마르코스의 독재와 선거부정을 직접 눈으로 봤는데도 백악관 강경파들이 허위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그는 레이건에게 마르코스와 거리를 둘 것을 비공개로 요구했다. 미련이 남아있던 레이건은 오히려 외교위원장을 설득하려고 했다. 미국은 마르코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다. 외교위원장은 결코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레이건 행정부가 마르코스를 지키기로 결정하자 외교위원장은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잘못된 보고를 받은 것 같다며 자신이 직접 확인한 필리핀의 혼탁한 선거와 독재 권력의 국민탄압 사례를 설명했다. 외교위원장은 여기서 머물러서는 백악관 참모들의 반격이 올 것을 감지했다. 그는 내친김에 워싱턴 오피니언 리더들의 경연장인 일요일 아침 주요 TV방송의 시사대담 프로에 차례로 출연했다. 필리핀 선거는 야당이 이긴 선거라면서 필리핀 민주화의 당위성을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슐츠 국무장관을 설득해서 강경파들을 여러 각도에서 압박했다. 레이건은 외교위원장을 조석으로 반복해서 접촉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필리핀 문제로 자당의 외교위원장과 척을 지는 것을 원치 않은 레이건 대통령은 얼마 뒤 필리핀 정부에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마르코스의 수명이 다했다. 비로소 ‘아키노 코라손’이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이 외교위원장이 바로 리처드 루거(Richard Luger) 이다.

‘리차드 루거’는 누구인가?

1976년에 상원에 입성한 리차드 루거는 올해가 36년째의 공화당 최고참 상원의원이다.[유타 주 출신 ‘오린 해치(Orrin Hatch) 도 올해가 36년째] 그가 선출직에 눈을 뜬 동기는 해군 정보장교로 복무할 때, 해군기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정보 브리핑을 하면서 그에게서 정치 지도자로서의 영감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이었다.
루거는 인디애나폴리스 대학을 졸업하고 로즈장학생으로 영국유학을 했다. 가족이 운영하는 농장과 식품가공 사업을 이어가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64년 인디애나폴리스의 교육위원이 되었다. 선출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67년엔 인디애나폴리스의 시장이 되었다. 시장으로서의 성공이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1976년 민주당 현역인 반스 핫크(Vance Hartke)를 누르고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1996년 그는 지구촌의 핵안전을 강조하면서 공화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 도전했다. 철학과 신념으로만 도전한 그에게 미디어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이오와에서 7등, 뉴햄프셔에서는 5등을 기록하고 경선을 포기했다. 그는 상원의원 36년을 거의 대부분 미국의 대외정책에 열정을 쏟았다.

조정과 통합의 리더십

외교위원회를 바라던 루거는 상원 입성 2년 만에 외교위원회로 배정을 받았다. 상급인 헬름즈가 위원장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에 2년간 위원장으로 활동한다. 바로 그 2년 동안의 활동으로 루거는 의회 역사상 가장 능동적인 외교위원장이란 평가를 받았다. 1985년과 86년 2년 동안 그는 겨우 재선의 경력으로 위원장을 경험했다.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를 공격할 때에 그가 다시 외교위원장이 되었다.
강경파 목소리만 득세하고 있을 때에 루거가 외교위원장이 된 것은 미국에겐 축복이었다. 전쟁에 대한 그의 냉정하고 초당적인 주장이 아니었으면 지금 미국이 어디쯤에 갔을지 상상이 어렵다. 공화당의 중심에 있으면서 그는 늘 초당적이고 중도적인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의 조정과 통합의 리더십이 미국 외교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오랫동안 그의 민주당 파트너였던 조 바이든 부통령과 그의 협력·조정은 이미 미국 의회역사에 빛나기 시작했다.
소련이 무너지고 5개 독립국가가 생겨나면서 그들 각자가 보유하게 된 핵무기가 세계를 두렵게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그의 초당적인 노력의 산물이 그 유명한 ‘샘넌-루거 프로그램’이다. 소련의 핵감축과 핵폐기 안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지금 세계 도처가 핵의 오염에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내가 만나본 루거의 면모

필자는 인디애나 출신의 어느 하원의원을 졸라서 리차드 루거 위원장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 2009년 여름이었다. 필자에게 루거는 한국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공동경비구역’을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강제규 감독’을 만나보라고 할 정도로 그 영화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한반도 분단과 관련해서 그는 큰 관심을 표했다.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아무리 험악하게 되어도 그는 정기적으로 자기의 보좌관을 북한을 다녀오게 한다. 필자는 루거 의원에게 의사당에서 ‘공동경비구역’ 상영회를 개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아직도 유효한 일이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005년 상원에 진출한 오바마 대통령은 가장 먼저 리차드 루거를 찾았다. 미국 상원이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미국의 외교정책에 관해서 그로부터 배웠다. 2008년 대선전에서 오바마의 대외정책 공약을 ‘루거 공약’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다.
지난 8일 인디애나 공화당 프라이머리에서 리처드 루가가 낙선 했다. 전국의 티파티 운동가들이 인디애나로 몰려가서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 공화당의 정책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다. 오바마의 정책을 쳐다만 봐도 가만히 안 있겠다는 티파티의 실력 발휘다.
36년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루거를 보면서 정치의 양극화에 가장 훌륭한 리더십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에 울화통이 터진다. 이제 누구를 찾아가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언급할 수 있을지 감감하다. 공화당이 외교에 있어서 제 무덤을 파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