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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회를 감동시킨 한인 마에스트로 노태철 교수, 그는 누구인가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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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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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철(盧泰哲, 51). 동양인 최초! 오스트리아의 자존심 비엔나 왈츠 오케스트라와 프라하 모차르트 오케스트라 지휘자, 러시아 최초의 동양인 오케스트라 지휘자, 러시아 음악의 역사를 새로 쓰는 마에스트로(maestro). 현재 러시아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객원지휘자이자 모스크바 국립 빠크롭스키 오페라극장 수석개원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는 노태철 지휘자에게 붙여진 수식어들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알려져 있지만, 3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어느 리서치연구소 사무실에서 나눈 그의 명함에는 ‘한국음악나눔재단’과 ‘한중교육문화연구소’의 직함이 찍혀있었다. 그와의 잠깐 나눔에서 CIS지역 고려인들에게 민족정체성을 심어주려는 그의 애정과 활동의 한 켠을 볼 수 있었다.

100년 전통의 헝가리 심포니를 비롯해 토론토 필하모닉, 모스크바 심포니, 서울시향 등 세계 100개 오케스트라와 600회 이상 음악회를 지휘한 경력의 전문음악인이었기에 잊혀진 동포들에 대한 그의 열정은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난 4월 말, 5월 25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모스크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위해 방한한 그가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사무실을 찾았다. 그와의 2번째 만남은 성공한 지휘자나 세련된 전문음악인으로서가 아니라 음악으로 세상을 치유하며 물질이 아닌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고 나누는 진정한 예술인의 상을 떠올리게 했다.

음악과의 인연 그리고 한국교육풍토

그가 음악을 접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경남 합천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이주했다. 60년대 배고프던 시절, 아무것도 없이 부산에 이주한 부모님은 터를 잡기위해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 밤 10시가 돼서야 귀가를 했다.
유독 음악과 운동을 너무 좋아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합창단 활동에도 참여했고, 운동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하루 4시간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하루 4시간씩 운동을 하다 보니 성적은 반에서 꼴찌였어요. 안되겠다 싶어 열심히 공부를 해서 전교3등까지 했는데, 목표로 했던 공과대학진학은 시험에 번번이 떨어져 실패했어요. 그러다 ‘대학에 떨어져도 후회 없이 떨어지자’는 생각이 들어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내가 원했던 성적이 나왔더라면 음대를 안 갔을 텐데, 조금 모자라 음대를 지원했어요.”

노 지휘자는 동아대학교 예술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군에서의 보컬활동도 했지만 전자음악보다는 클래식 음악이 좋아 대학에서 작곡공부도 하며, 음악에 대한 이론공부에 열중했다고 했다. 이론공부 위주의 한국식 학습방법 때문에 유학시절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경험을 해야 했지만......
그는 대학졸업 후 1년 남짓 중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학생들에게 자기적성에 맞는 노래와 춤, 피아노 등을 할 수 있도록 실기에 치중하는 한편 이론 시험은 정답과 함께 가르쳐 주어 치르도록 했다. 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 교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내 다른 교사들로부터 질시를 받아야만 했다. 조그만 잘못에도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 구타하고 야단치는 것이 당연시 되던 당시 강압적 교육문화와 쉬는 시간 바둑과 주식에 몰두해 있는 타성에 젖은 교사들을 바라보며 교사로서의 꿈을 접었다고 했다.

“비행학생들은 징계한다고 변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학교는 애들을 보듬어주기보단 학교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최근 대학 교수직을 그만 둔 것도 타성에 젖은 대학문화와 교수들 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 조용히 눈을 감고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노태철 지휘자.
노 지휘자는 최근 재직하던 국내대학에 사표를 제출했다. 유럽과 러시아에서 지휘자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2009년 국내 모 대학 총장으로부터 도움요청과 함께 교수직 제안이 들어와 관현악과를 맡아 2년 만에 학생 수를 20명에서 80명으로 늘리기도 했다. 대학도 투자가 되어야 잘 된다는 생각에 아는 지인으로 부터 후원을 받는 등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무 잘나가는 것을 경계하는 교수들의 타성과 잘못된 생리 때문에 관계가 악화됐다.

“한국 대학의 생리를 모르고 나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다른 유능한 교수들이 주어진 일 외에 움직이지 않은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됐어요. 한국 대학에 대한 회의가 들더군요. 저는 교수실도 학생들에게 개방했어요. 누구든 와서 쉬고, 컴퓨터도 하고 악기도 연주할 수 있도록 했는데, 학생들은 좋아했지만 다른 교수들은 싫어했어요. 자신들과 비교가 되고, 물건들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다는 이유였죠. 국내와 외국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비교해 봐도 교육에 대한 반응을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 단원들은 내가 어느 단원을 야단치거나 하면 서로 감싸주고 옹호해 줍니다. 그러나 한국은 야단친 단원에 대해 뒤로 와서 고자질을 하죠. 이런 것들이 바로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교육만을 강요받은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노 지휘자는 “비교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 행복은 깎인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외국인에 비해 능력이 많고 눈치도 빠른 장점이 있음에도 이런 잘못된 비교의식 때문에 행복수준이 낮아진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노 지휘자는 대학교수직을 내려놓은 후 지휘할 때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남들에게 비친 자신의 부족함도 있었을 것이라며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지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안정된 직장이긴 하지만, 교수생활 10년을 했다면 아마 마음도 나태해졌을 것이고, 비즈니스맨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예술가로서는 머리가 굳어져 내 음악인생이 끝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럽으로의 유학 - 음악에 대한 새로운 도전

대학 졸업 후 중학교 교사생활을 하며, 개인레슨 활동을 통해 교사월급보다 4배나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클래식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세금을 가지고 오스트리아 뷔르쯔 부르그 국립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입학시험을 칠 수도 없는 높은 현실의 벽을 절감해야 했다. 음대수석졸업을 했지만 선택한 지휘학과 입학시험은 높은 수준을 요하는 피아노 청음시험이어서 시험을 칠 수 조차도 없었다. 한국에 돌아갈 수도 없었던 노 지휘자는 한국학생이 없는 오스트리아 남부에 있는 세계 예술인들이 모이는 학교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9시간의 독일어 공부와 4시간의 청음훈련 피아노 공부에 열중해 1년 만에 입학을 했다.

“밤낮없이 공부에 매달리느라 태어난 지 3개월 된 아이도 돌보지 못했고, 주말에만 잠깐 시장을 보기 위해 자전거로 칠흑 같은 춥고 어두운 14km 정도의 거리를 다녀오곤 했어요. 꼭 해야만 하는 공부였기에 했지 돈 주고 하라고 해도 못했을 겁니다.”

   
▲ 2011년 평택시 청소년문화존 - '청소년, 클래식과 친해지기' 공연에서의 지휘 모습.
1년간의 각고의 노력으로 지휘학과에 입학한 그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1994년 헝가리 하이든 챔버 오케스트라를 맡았다. 1997년에는 동양인 최초로 오스트리아 빈엔나 왈츠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에 발탁되었고, 러시아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러시아 음악의 역사를 다시 쓰는 명실 공히 유럽음악계가 인정하는 지휘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지휘봉을 잡을 때마다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했다. 모든 소리를 귀로 듣고 가려낼 수 있는 지휘자이기에 연주할 모든 곡을 피아노로 쳐 보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승화해 나간다고 했다.

그에게 유럽인들의 동양인 지휘자에 대한 선입견이 어떤지 물었다.

“예전에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가 피부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언어와 문화의 차이였습니다. 문화와 언어를 모르면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동양인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노 지휘자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도 모르는 사람끼리 한 방에 있으면 서먹하지만 러시아 단원들과는 그런 서먹함을 느낄 수 없으니 자신이 동양인일지라도 그들에게 차별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노 지휘자는 “한국인은 정의 문화가 강해서인서 공공의 이익보다는 가족의 이익이 우선인 것 같다.”며
“오케스트라는 앙상블을 이뤄야 하는데 한국인은 솔로 위주로 튀어야 산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노 지휘자는 또 외국은 협동심을 기르기 위해 악기다루기 전 어려서부터 합창을 먼저 시키는 반면 한국은 악기다루는 것부터 시킨다고 지적했다.

연주보다 중요한 것은 단원들과 함께 행복을 느끼는 것

노 지휘자는 동양인 지휘자로서 무시를 당한 적이 없다고 했다. 실력이 없어서 무시를 받는 것이지 동양인이라고 무시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 필자와 인터뷰 중인 노태철 지휘자
“내가 실력이 없을 때는 단원들과 많이 싸웁니다. 내 방식대로 시키려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단원들을 강압적으로 다루고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입니다. 단원들은 지휘자가 자신들을 타고 넘는지 아닌지 한 번 연습해보면 다 압니다. 공부 안 된 지휘자는 무시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 지휘자는 단원들과의 연주 연습도 단원들의 상태를 보아가며 시킨다고 했다. 연주보다 중요한 것이 단원들과의 화합과 교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음악보다 삶이 중요함을 느끼고 있다. 연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결국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번은 호른 악기를 연주하는 자가 스트레스를 받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지휘자로서 단원의 행복을 챙기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굳혔다고 했다. 노 지휘자는 ‘음악도 행복을 위한 것’아니냐고 반문했다.

노 지휘자는 해외공연을 다니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에 비춰볼 때 사람들이 물질을 통한 행복보다는 정신적 행복에 더 만족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술을 행하고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의 치료를 행하는 일들이 그런 의미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노 지휘자는 한국에서 때론 갈등을 느끼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한국에서 공연을 하다보면 표를 사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을 보면 ‘사람들이 원치 않는 일을 내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한국이 물질만 추구하는 사회라면 난 아마 한국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클래식은 그에게 있어 신앙이다. 그에게 음악이 없었다면 생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왜 재미있는 대중음악을 하지 클래식음악을 하느냐’고 묻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이 이렇게까지 기쁨을 줄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음악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 너무 감사하고, 소중한 삶이었다고 술회했다.

고려인들과의 만남

20만 명에 달하는 연해주 한인들에 대한 구소련의 잔혹하고 비참하고 야만적인 강제이주로 2달 만에 2만5천명 이상이 이주과정에서 사망했고, 대략 17만여 명 정도가 중앙아시아에 지역에 정착했다.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고려인 후손들은 약 2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노 지휘자가 고려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단원들 중 일부가 나를 고려인으로 생각했는지 러시아 고려인들 중에도 국회의원, 시장, 택시기사들이 있다며 관심을 가지고 만나보라고 했어요. 이들과 자꾸 만나다보니 우리 핏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됐어요. 힘든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끈질긴 민족임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노 지휘자는 그 후로 고려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게 됐다. 그는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고려인들을 위해 표를 따로 받아두기도 하고, 자비로 표를 매입하기도 했다. 이들 고려인들도 수준 높은 문화를 접해야 스스로 격을 높일 수 있고, 한인으로서의 자긍심도 높아질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초라한 행색으로 시장에서 장사하고 택시운전을 해도 음악회에 오는 날에는 정장차림으로 오는 모습을 보면 흐뭇합니다.”

노 지휘자는 식당을 가거나 택시를 탈 경우 될 수 있으면 고려인이 운영하는 곳을 택한다고 했다. 예술가는 세상과 같이 가는 사람이지 자기만 혼자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세상과 동떨어진 예술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의 고려인에 대한 선행도 따지고 보면 고려인들의 정신적 치유(힐링)을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 2010년 상봉초등학교 초청 타타르스탄 국립 심포니 오케스타라 공연.
요즘 노 지휘자가 집중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고려인들의 모국방문사업이다. 고려인의 모국방문은 러시아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계기도 되지만, 무엇보다도 모국방문 후 고려인들이 정체성을 되찾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고려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한국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을 돌아보면서 ‘나에게도 조국이 있구나, 조국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자각하게 됩니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모국방문사업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됐지요.”

한번은 러시아 볼가TV 기자를 초청해서 한국의 이모저모를 찍어 7차례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이후로 고려인에 대한 이미지가 확 바뀌었다고 했다.
노 지휘자는 고려인 모국방문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장들을 만나서 도움을 청하고 있다. 특정목적을 두고 하기보다는 그때그때마다 형편이 되는대로 돕는다고 했다.
노 지휘자는 다른 한인들과 함께 고려인들 외에 불가리아에 있는 집시자녀들을 돕는 일도 하고 있다. 자신의 노력은 남을 돕는 많은 사람들에 비해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겸손해 했다.

“돕고 싶어도 방법을 몰라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세상

노 지휘자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는 대표를 맡고 있는 ‘한국음악나눔재단’을 통해 소외지역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부모와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나,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쳐주고 음악을 매개체로 놀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런 소외된 아이들이 세계적인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예술이라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예술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고, 하나만이라도 잘 할 수 있게 한다면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 지휘자는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며, 그러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정부나 뜻있는 분들의 참여를 바란다고 했다.

노 지휘자가 꿈꾸는 또 하나는 클래식을 전공하는 후배들을 돕는 일이다. 한국을 넘어 다른 나라에 진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한국이 앞으로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최고의 부유한 나라가 되겠지만, 이것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나라가 되도록 내 분야에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노 지휘자는 퇴폐, 저질문화가 판치는 대중문화와 인기영합에 치중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서로 싸우고 비교하고 경쟁만 하는 현대사회에서 정신적 건강을 위해 감동이 넘치는 무대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아름다운 노력은 자신만의 해석을 통한 지휘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내는 오케스트라의 음률만큼이나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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