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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의 영원한 아웃사이더 양동준(梁東準) 교수, 그는 누구인가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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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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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동준 / 요코하마 가나가와대학 객원교수
재일 역사학자이자 문화 활동가인 양동준(만73세) 요코하마(横浜) 가나가와(神奈川)대학 아시아문제연구소 객원교수가 해외교포문제연구소를 찾았다. 지난 11월 2일 서울시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호텔(7층 글로리아홀)에서 열린 “2013 교포정책포럼”에 참가했다가 인터뷰를 요청을 받고 방문한 것이다.

‘동경일한친선협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양 교수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건국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 유학생 등으로 구성된 ‘재일한국학생동맹’(한학동) 위원장을 맡아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펼치기도 했다. 그 후 조선장학회에서 26년 간 근무하며 재일동포 민족교육에 관여해 왔으며, 현재는 한・일간의 역사와 문화교류를 위한 연구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일본에 거주하게 된 것은 할아버지 대(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큰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일본 순사에게 쫓기다 일본으로까지 흘러왔다. 일본에 정착한 할아버지는 당시 16살 난 아들(양 교수의 부친)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같이 살게 됐다. 그 후 할아버지의 우편을 통한 중매로 고국에 있는 어머니를 만나 일본에서 결혼을 해 3남 1여를 낳았다.

청년 시절의 활동 – 한학동과 민단

양동준 교수에게 과거 재일교포사회의 이념대립이 한창이던 시절, 어떻게 해서 재일한국학생동맹(한학동)과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에 참가하게 되었는지를 캐물었다.

“아버님(梁惠承)이 민단의 의장을 역임하셨어요. 민단 간부의 자제들은 민단에 가입을 안 하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참가하게 됐어요. 와세다대 재학 중 한일회담이 추진되고 있었는데, 난 사실 한일회담에 반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민단간부로 계신 관계로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방편으로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 양동준 교수 부모님 결혼식.
양 교수는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영주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재일교포 차별반대운동을 펼치는 한학동 가입을 결정했다고 했다. 당시 한국유학생이 많았던 와세다대학에서 한학동 활동을 하면서 대학 내 ‘한국문화연구회’ 간사를 맡았고, 1966년 한학동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양 교수는 민단에서의 활동을 꽤했으나 한학동 선배 출신인 김재숙(金宰淑) 전 민단중앙 단장으로부터 조직복귀에 대한 지원사격을 받지 못했다. 한일협정을 반대한 사람이라는 이유였고, 후에 반정부단체로 낙인찍힌 한민통에서 활동한 아버지의 전력문제도 걸려 있었다. 양 교수는 처음에는 한학동도 한국정부가 개최하는 간부연수회에 참석해 반공교육도 받곤 했는데, 후배 간부들이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 등 나사 풀린 학생들로 취급받는 바람에 이미지가 좋지 않았고, 그런 한학동을 민단이 꼴사납게 바라보는 시기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 후 난 한학동 활동을 떠나 공부에 열중하려 했으나 친구들은 자꾸 운동하라고 부추기고, 한국에서 민주화관련 여러 사태가 발생하자 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는 바람에 대사관에 불려 다니기도 했어요.”

결국 이런 일로 그는 장학금이 다 끊겼고, 오사카 민단 의장을 하고 계신 부친으로부터 당시 5만 엔을 받아 학비와 활동비를 쓰며 생활했다고 했다.
양 교수는 와세다대학 졸업 후 오사카로 내려가서 민단활동에 참여했는데, 당시에는 한국정부의 민단에 대한 지원금이 전혀 없던 시절이어서 총무차장를 맡아 1년간 모금활동을 했다. 오사카 지역 경제인들을 찾아다니며 1년 치 후원금을 내 놓으라는 식이었다며 어렵던 민단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모금한 돈으로 오사카민단은 물론 부인회와 청년회를 지원했다.

그 후 건강상의 이유로 오사카 민단 활동을 그만 두고 있을 무렵, 조선장학회의 요청으로 도쿄로 건너가 조선장학회 장학부 과장을 맡아 일을 했고, 1년 후 지도부장에 올랐다. 조선장학회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조선장학회에서의 활동

   
▲ 가족사진(뒷줄 왼쪽 두번째가 양동준 교수)
당시 조선장학회 지도과장은 총련 계통의 사람이 맡았다. 1971년 당시 조선장학회는 대학・대학원생 400명, 고등학생 700~1,300명에게 장학금으로 연간 4억 엔의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었다. 조선장학회 건물은 대지 510평에 건평 6,000평으로 월 임대료가 1억 엔 정도였다. “아마 그 수익금을 안 쓰고 모았더라면 노벨상 기금만큼의 규모가 되었을 것이다.”며 조선장학회 운영형태에 대한 아쉬운 단면을 피력하기도 했다.

조선장학회는 민단과 총련의 협의체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선장학회가 만들어진 계기를 양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신홍식이라는 인물에 의해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장학회 대표를 지낸 신홍식 씨는 조총련 의장을 지낸 한덕수보다 한 수 위의 인물로 알려진 총련계통의 사람입니다. 신홍식 씨는 전남 광주 생으로 광주학생운동 관계로 도일한 후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고, 관동대지진 당시 전차 안에서 붙잡혀 일본 육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어요.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던 2.8운동은 1919년 2월 8일에 일본의 유학생들이 일본YMCA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낭독한 독립운동인데,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유학생감독부를 통해 조선유학생들을 달래는 일을 하고 있었죠. 광복 후 조선총독부 재산을 조선인에게 돌려주게 돼 있었는데, 조선유학생 사상관리를 담당했던 총독부 관할 지역 땅을 돌려받게 되자 민단과 총련은 이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다툼을 치열하게 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학생들은 돈이 없어 땅을 팔아먹기도 했으나 신홍식은 510평의 땅을 확보했고, 이인직 씨는 책상하나만 놓고 기거하면서 지켰다고 합니다. 물론 송기복, 윤치하 같은 분들의 노력도 있었지요. 이런 터전위에 조선장학회 건물이 설립된 것입니다.”

조선장학회 건물을 두고 민단과 총련의 다툼이 지속되자 일본정부는 중재를 통해 민단과 총련 그리고 일본정부 3자가 2명씩의 이사를 파견해 공동운영하는 형태의 조직으로 만들었다.

“조선장학회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사람이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데, 당시 민단 측 실무자는 나 혼자였고, 총련 측은 몇 사람이 집단으로 나와 근무를 했기 때문에 총련 측 세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규약에 따라 운영해야 한다고 강력히 맞섰습니다.”

양 교수는 당시 조선장학회의 장학금이 실질적으로는 총련보다 민단 측에 더 많이 지급되고 있었기에 총련 측은 불만을 제기했고, 민단 측 총무를 맡고 있는 양 교수는 총련 측 총부부장 또는 다른 간부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총련 측도 당시 건국고 학생에 대한 장학금 지급을 제하고 있는 터라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양 교수는 조선장학회에서 꼬박 26년을 근무했다. 그에게 왜 오랫동안 근무한 조선장학회를 떠나게 됐는지 그 사연을 물었다.

“장학생들을 모집하는데 있어 총련 측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어느 쪽을 막론하고 상공회 간부 자녀들은 장학생에서 배제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총련은 조선학교 간부 자녀들만은 줘야 한다고 하고 난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극구 반대했었어요. 내가 1995년 민족교육과 관련해 쓴 책(‘夢いつも旬’, 新幹社)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던 총련 측이 나에게 술 문제 심지어 여자문제가 있다며 재일상공회에 투서를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민단 측 정환기 씨 등이 문제를 삼았고, 당시 민단 감찰위원장이던 신용상 씨가 그전에 조선장학회 감사로 들어오려 했으나 총련 측이 반대하고 나섰는데 그것도 내가 반대한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후에 민단 단장이 된 신용상 단장이 날 불러 ‘한국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대한민국 사람이냐’며 닦달하기에 내 여권을 보여주며 오해를 불식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 2013년 11월 2일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주최 '2013 교포정책포럼'에 참석한 양동준 교수
민단 측에서 양 교수의 이사자격정지를 시키려하자 일부학교 선생들과 장학생 출신자들이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조선장학회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총련의 모략과 민단 측의 오해로 내가 결국 조선장학회를 그만 두게 됐어요. 스스로 사임한 것처럼 돼 있으나 실상은 민단 측으로부터 배제됐던 것이지요. 조선장학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1980년 이후로 바뀌기 시작했는데, 서로 조선장학회에 들어오려고 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 쫓긴 꼴이 된 것입니다.”

양 교수는 당시 자신을 지지해 준 세력이 적어 쫓겨났다며, 조선장학회를 구만 둔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양 교수는 이후 일본 내 재일동포 차별문제와 역사문제에 대한 관심을 두고 일본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연에 나서게 된다.

“오랫동안의 이뤄진 구체적인 내 행적이 있으니 날 아무리 빨갱이라는 올가미를 씌워도 소용없는 일이 된 것이지요”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사건

양 교수는 아버지가 ‘김대중구명위원회’ 오사카 위원장을 맡았으나 자신은 한민통에 직접 관여한 적은 없다고 했다. 부친(1979년 작고)의 한민통 활동 때문에 연좌(連坐)적 소문이 난 것이라고 했다.

“당시 곽동의(郭東儀), 씨가 민단 학생들을 선동하여 따라오도록 했으나 많은 학생들이 따라가지 않자, 한학동 활동을 하고 있던 나를 통해 따라 오도록 하려고 했었죠.”

양 교수는 아버지(梁惠承)의 한민통 활동 관련과 자신의 한학동 활동 때문에 민단에서 이사자격정지를 시킨 것이라고 했다.
조선장학회를 그만 둔 양 교수는 그 후 재일동포 차별철폐운동에 뛰어들었다. 일본 전국에 있는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재일동포차별’에 대해, ‘공생이란 무엇인가’ ‘왜 일본인에게는 차별이 안 보이는가’ 등을 주제로 한 달에 1번 이상 강연을 해 오고 있다.

양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을 일본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당시 재일교포들이 나서는 사람이 없었으나 양 교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소신에 따라 추도식을 거행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한쪽에서는 그에게 총련 사람, 한쪽에서는 민단 사람, 한쪽에서는 한국 사람이란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양 교수는 “나는 나일뿐이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 사람이다.”라는 확고한 소신을 견지했다.

관료화된 민단

양 교수에게 민단에 대한 평가를 들어봤다. ‘민단 간부들 특히 지방간부들 중에는 민족학교 출신들이 많은데, 균형 잡힌 태도를 보이지 못하며, 조선학교를 총련 소속으로만 몰아가고 있는 것은 배신행위이다’라며 그들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나마 조선학교 출신자들인데, 민단지도자들은 한국어 교육이나 민족교육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민족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탓에 일부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고, 따르는 사람들조차 많지 않습니다.”

양 교수는 민단이 뉴커머들을 수용하고 포용할만한 비전과 전략도 안 보인다고 비판했다. 뉴커머들도 20년 이상 지났으니 그 자녀들도 지금의 교포 2~3세들처럼 정체성을 상실해 갈 텐데 이에 대한 대비도 없다고 씁쓸해했다. 민족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나 재일교포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을 민단이 등용해야 함에도 관료적 사고에 젖어 있어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일본 극우단체들의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에 대한 항의와 해결을 위한 노력도 없을뿐더러,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해서도 그 사실관계를 잘 모르니 반박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논리적으로 반박한 경험도 없으니 중앙간부도 아닌 자신 같은 사람들이 나서서 반박했던 것이라고 했다.
재일교포들이 생활보호, 연금 문제 등에서 특권을 누르고 있다는 일본 극우단체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욕만 할 뿐이지 논리적으로 따지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민단의 대처방식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 2011년 9월 당시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민단 지도자들은 싸움의 현장에서 도망치지 말고 직접 나서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반박하고 교섭해야 합니다. 지금의 민단 간부들은 관료화되어 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뉴커머에 대해서도 틀린 점을 지적만 말고 다른 점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 교수는 민단의 선거문제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재일교포사회를 이끄는 각종 단체의 간부나 지도자들조차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고, 한정된 대의원을 상대로 돈 선거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런 것이 큰 문제”라며, 민단의 민주주의 실천을 주문했다. 또 민단의 이념편향성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민단중앙 간부 중에는 한국의 국시를 반공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돼 있는데, 지금 세계 어느 나라에서 반공을 국시로 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민단이 철학을 가지고 교포사회에 봉사를 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양 교수는 그동안 주요활동 중 하나로 삼았던 한반도의 3.8선 관련사진 책자 ‘현대의 비경(現代の 秘境)’를 발행했다. 또 ‘한국위인전’을 재일교포들이 읽을 수 있도록 출판을 하는 한편, 민족교육 진작(振作)에 힘쓰고 있다. 틈틈이 인천과 동대문 지역 장애인시설에 휠체어 30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또 1905년 일본군이 약탈해 간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반환에 기여하기도 했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중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퇴한 정문부 장군의 공을 기려 숙종 때 세운 전승 기념비다.

   
▲ 안중근 의사의 친필 족자와 안중근 의사 부인과 자녀사진
현재 양 교수는 일본에 있는 안중근 의사 유품을 국내로 반환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도교 도쿠도미공원(蘆花恒春園)에 숨겨져 있는 안중근 의사 유품을 한국에 반환하기 위한 작업을 펼치고 있으나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해 관련단체들과의 협력을 강구해 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내년 3월에는 안중근 의사 추도식을 일본에서 개최하는 방안도 세웠다고 했다.

역사 강연과 문화 활동

양 교수는 일본인의 한국역사에 대한 무지를 안타까워했다. 오랫동안 역사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면서 일본인들에게 한일관계를 중심으로 한 증거자료를 보여주며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일본인들이 한일관계에 관한 역사를 보지 못하는 이유로 교사들의 한일관계 역사에 대한 무지함에 있다고 보고 일본 전역을 돌며 홀로 역사 강연을 펼치고 있다. 1981년부터 시작된 이 순회강연은 2006년까지 25년간 180여회에 이른다.

양 교수는 문화에 대한 관심도 깊다. 한국영화를 좋아해 수많은 한국영화를 보았다고 했다. 95년 방영된 모래시계 드라마를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하루 종일 빵과 우유만 먹으며 한꺼번에 전편을 시청하기도 했다. 한류 붐과 함께 그가 한국드라마와 영화를 본 것만도 수백 편에 이른다. 2005년도에는 민단에 ‘전국노래자랑’ 개최를 제안해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한류 붐이 일고 있는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활용해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 못하는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즐겁게 볼 수 있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1992년부터 2010년까지 역사공부를 곁들여 강연을 해왔다. 그의 이러한 노력덕분인지 2009년 가나가와(神奈川)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현재 이 대학을 대표하는 문화강의를 맡고 있다. 박사학위 없이 일본 대학교수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 됐다.

   
▲ 일본 NHK방송 관계자를 데리고 3.8선을 방문해 한반도 분단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근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작품은 한반도 3.8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단순히 사진만을 찍는 것이 아니라 촬영과 편집을 통해 동경에 있는 미술관을 대여해 전시하는 작업 등을 펼쳤다. 이 사진전 공로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으로부터 특별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특히 일본 NHK방송 관계자를 3.8선에 데리고 가 한반도 분단의 현장을 보여주며 동물들의 천국이 된 비무장지대가 조상들의 의지가 아니며, 한반도는 반 해방, 반독립 상태임을 상기시켜 주며 방송토록 했다.

양 교수에게 지나온 삶에 있어 억울한 부분이 있느냐고 물으니 한마디 말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내가 조금 부족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다보니 나름 인정해 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올해 만73세인 양 교수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볼 때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앞으로도 열심히 미련 없이 살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 교수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우리역사를 보며, 조선말기 조상들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생각에 원망만 했었습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선조들의 잘못이 있긴 하지만, 깊이 공부해보면 고종황제도 끝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번민했는지 생각되는 부분이 있어요. 국력이 약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현재의 한반도 분단을 보면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루속히 통일을 이뤄야하는데, 배부르고 등 따뜻하다고 불쌍한 동포들을 깔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안타깝습니다. 이제 후배들이 철학을 가지고 불의에 항거하고 책임 있는 자세로 살아가길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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