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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 외발로 역사의 질곡을 넘다– 항일투사이자 민족작가인 김학철의 삶
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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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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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혁 /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이사 ]

 

   
▲ 김혁 / 연변작가협회 이사

일전 “중국조선족 문단의 대부” 김학철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문학전기 “송엽장(쌍지팡이)아래의 자국”을 작가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중문으로 펴냈다.
모순문학상 입선후보작을 펴낸 실력 있는 한족작가 우뢰에 의해 창작된 전기는 장장 70여만 자의 호흡이 긴 편폭에 정의를 위해 무기와 펜을 고누잡고 일평생 싸워 온 김학철의 파란 많은 자취를 추적해 냈다.
이는 처음 중문으로 창작된 김학철 관련 인물전기로서 중국의 주류문단에 김학철이라는 한 조선족 작가를 다각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알리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사료된다.

책의 겉장은 중국소수민족문학관 관사 정원에 주조된 김학철의 동상으로 디자인했다.
양쪽 겨드랑이에 송엽장을 짚고 우람하게 뻗쳐 선 척각의 로인,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 쌍의 눈. 김학철 옹의 그 강건한 모습이 다시 한 번 우리들의 면억(緬憶)을 불러낸다.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녔다.
재학 시절 왜적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 거사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고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온다.

   
▲ 김학철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반일지하테러활동에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호주머니에 권총 한 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無政府主義者)들의 전형적인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탄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이때로부터 김학철이라는 가명을 사용, 반일활동을 위해 썼던 가명을 마지막까지 자기 이름으로 썼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김원봉(金元鳳)의 부하가 된다.
1937년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즉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었으며 교관이던 김두봉, 석정 등의 영향으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로 탈바꿈한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 과정을 1년간 앞당겨 마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에 소속된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기나긴 협상을 통해 중국 대륙에서 최초로 합법화된 한국인 무장조직이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이후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혁혁한 전과를 거뒀고 훗날 중국 팔로군에 편입됐다.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상을 보인다.
1939년부터 후난 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 선전활동을 전개, 그 이듬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0년 가을에는 팔로군에 참가하여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 일본감옥에서 출옥한뒤의 김학철

1941년, 여름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허베이(하북) 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에서 있은 치열한 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부상당한 몸으로 일본군의 마수에 떨어진다.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그 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에 이송된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키형무소에서 그 무시무시한 원폭피해를 요행히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전향서 쓰기를 거부했기에 총상을 입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다가 수감 3년6개월 만에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학처럼 외다리로 선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하라는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된다.
해방된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한다.
문학에 대한 열정에 다시 기름을 부어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륙속 “담배국”, “균렬”,등 10여 편을 여러 문학지에 발표했다.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1947년 사회주의 이념을 실천코자 38선을 넘어 조선으로 간다.
평양에서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 등 직을 지내다가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여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낸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연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나 반년 만에 사직하고 전업 작가로 맹활동했다.
단편집 “새집 드는 날”,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 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속에서 “반동분자”로 분류됐다. 그는 극단적인 개인숭배로 치닫던 동란의 년대에 이의를 표하며 시류와 불화했다. 드문 반골기질에 자신을 엄격히 규율한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불의와 한 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한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는다.
10년 유기징역을 언도받고 산과 물에 둘린 추리구(秋梨沟)의 감옥에서 복역한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 되었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 1983년에야 정식으로 누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1983년 국적문제를 해결보아 중국국적을 가졌으며1989년에는 49년 만에 당적을 회복하여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였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스르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슨 펜을 닦고 잃은 시간을 벌충하듯 창작에 일로매진한다.

   
▲ 김학철의 저서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이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86년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1987년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연이어 출간되었다.
이밖에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었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이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동안 촌철살인의 수필과 잡문에 심취되어 수백 편을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레 문단에서도 한 획을 긋는다.

조선족 학계는 “김학철 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그의 작품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이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 것”이라고 자호감을 머금었다.
한국의 평론가들은 김학철의 작품은 1990년대 냉전붕괴 이후 그때까지 “좌익금기”에 속박 당했던 한국의 문학지형을 흔들고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유명 평론가 김윤식은 “김학철은 그 자체가 역사요, 기구한 한•중•일 현대사의 광대한 미발굴 지층 탐사의 한 이정표“라고 정평했다.
또 중국의 왕혜 청화대 교수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어떻게 유효하게 저항하고 그것들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아시아 근대의 역사적 과제를 풀고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데 김학철 문학이 긴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보무당당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다.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었다.

   
▲ 중국소수민족문학관에 건립된 김학철 동상
반일투사이며 민족작가로서 그이는 일평생 곡절로 점철된 인생길을 걸어왔다. 이렇게 파란 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도 드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려서 민족독립의 청운을 안고 일제와 사투를 벌렸고 그 최전선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뒤에는 문학이라는 또 다른 수단으로 잊힌 민족사를 묘파하고 복원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부상, 탄압, 망명, 옥살이 등 범인들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현실로 인해 글쓰기가 쉽지 않았지만 죽는 날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자신이 경험했던 시대와 너무도 많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간결하면서도 맛깔스러운 문체로 격동적인 시대와 그 도가니속 삶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었다.

척각(隻脚)의 몸이지만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선 김학철,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둔감해져 있는 물욕화에 절은 오늘날, 그이의 올곧고 강인한 작가정신과 실천적이고 치열한 인고의 삶은 우리 문학에 미래지향적인 동력을 안겨주는 귀한 재부로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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