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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교육 - (9)< 언론을 말미암지 않고는 저명해질 수 없느니라 >
김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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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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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오 / 호주한국일보 편집고문,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
 

   
▲ 김삼오 호주한국일보 편집고문

사회 현상에 대한 학문적 분석과 이해는 개념을 가지고 하게 됩니다. 이때 개념은 도구(tools)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연장이라고도 부르는 이게 있어야 목수가 집을 지울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와 우리 민족의 문제를 분석하고 이해하고 해답을 찾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 한 가지 도구로서 저는 저명성(prominence)을 꼽습니다. 왜일까요? 오늘의 한인(고국과 해외 한인)은 지나치게 이 인간의 욕망에 목을 매는 게 탈이고, 이 변태(잘못된 행태)가 우리 사회와 민족의 방향을 잘 못 이끌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명성의 속성을 깊이 이해한다면 산적한 우리 사회와 민족의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명성은 대중으로부터 누리는 인정(認定), 쉽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이유로 널리 알려지는 상태입니다. 그럼 어째서 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정신적 욕망이 지금의 우리 사회 장래의 풍향계가 되고, 문제 해법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인가 좀 잘나고, 돈 좀 가졌다면 팔자에 없는, 말하자면 분수에 맞지 않는 저명성을 검어 쥐려고 안간 힘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저명성은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좋은 일을 해서 자연히 얻어져야 하는데 권모술수로 검어 쥐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인간들이 많다면 사회가 조용하고 건전하게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십시다. 약 100년 전 농경사회 때만해도 만석꾼, 천석꾼 부자가 인심을 베푼다면 그 지역에서 소문이 자자했었습니다. 한 가지 저명성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돈의 위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 차원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우리 사회가 고도로 권력화, 산업화, 대중화 된 까닭입니다. 오늘날 지역주민에게 몇 푼의 돈으로 인심을 얻고 호인 대접 받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 있으면 모두들 그걸 발판으로 명예와 명성을 차지하려고 나름대로의 암투를 벌이는 게 현실입니다.

명예와 명성은 여러 가지지만 보통의 한국인이 먼저 생각하는 건 굵은 직함과 영향력입니다. 거기에 ‘먹물'까지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입니다. 대학 교수만이 학자와 지식인은 아니나 그 자리를 차지하면 그 명예 하나는 따 놓은 당상입니다. 고위 정치인, 고위 관료 말고도 재벌 출신들이 퇴직하면 어느 대학 겸임교수나 석좌교수로 먼저 가는 것을 요즘 아주 흔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돈이 많다면 아예 대학을 손수 만들어 학문에는 관심이 없는 자녀나 조카들을 총장, 학장, 교수로 앉혀 놓을 수도 있습니다. 돈을 주어 남을 시켜 책을 내는 일도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政), 관(官), 재(財), 학(學)계를 두루 거치는 거짓 인물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야말로 돈 있으면 ‘하면 된다.’ 아닙니까. ‘Can Do Spirit’ (‘하면 된다 정신’)가 어디 따로 있나요?

그래서 돈은 먼저 벌어 놓고 봐야 하는 황금만능사회에 살게 된 것이지요. 돈에 대한 탐욕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회의 삶의 질과 민족의 품격은 어떨까요? 그 답이 최근 세월호 참사 후 마치 백일장을 방불케 하는 신문과 방송칼럼에 멋지게 묘사되었으니 저는 생략합니다.

문제는 역시 저명성의 속성입니다. 저명성 자체에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s)는 없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나가는 허상일 수 있습니다. 어떤 재벌의 아들은 물론, 그 밖에도 몇몇 재력가가 엄청난 사재를 쏟아 부어 지역구에 도로와 위안 시설을 만들어 주고 주민들의 인기를 얻어 정치에 입문했고 평생 정치를 할 기반을 쌓았습니다.

석좌교수가 무엇인가요? 각 분야에서 남다른 기여를 남긴 학자를 대학에 모셔다가 새로운 연구 풍토를 조성하기 위하여 마련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적어도 새로운 이론적 모델이라도 하나 만들어 낼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가 매번 정권 교체 때마다 인사 안배의 일환으로 전직 관료들에게 돌아간다면 어떻게 되나요? 이런 식의 허상에 저명성을 듬뿍 안겨주는 한국 국민과 민족의 느슨함과 안일함과 취약성이 오늘의 사회 혼란을 만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걸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더 말할 게 없지요.

안빈낙도하는 선비

저명성의 허상을 만들어나가는 사회제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언론입니다.

이 글의 제목은 물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한 성경 구절(요한복음 4장)을 패러디 한 것입니다. 적절하지 않은 비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언론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어 한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오늘의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매스컴(매스커뮤니케이션=대중매체=언론)을 타지 않고’는 저명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매스컴을 말미암지 않고는’ 저명해질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매스컴은 아무에게나 저명성을 주지 않으나 진정 저명해야 할 사람도 비껴감으로써 무명인(nobody)으로 파묻혀버리게 할 수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매스컴이 없던 전근대 한국사회에서는 저명성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정직하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선비가 설 자리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주류 매체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을까요? 천만입니다. 밤낮 자유를 부르짖지만 고객이 넘쳐나는 큰 언론의 문턱은 매우 높습니다. 이건 오늘 언론의 많은 순작용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역작용입니다.

고국의 동포들이 저명성에 목을 맨다면 해외의 형제자매들도 별 수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눈 먼 돈도 권력도 저명성을 띄워줄 큰 매체도 없습니다. 고국을 흉내 내지 말고 우리대로의 진정한 의미의 삶의 가치와 진실 된 저명성을 찾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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