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수필가]

▲ 이영주 수필가

요즘 '미생(未生)'이란 드라마가 인기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서 '미생'이란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아 그 뜻을 찾아보았다. 미생은 바둑용어로 집이나 대마 등이 아직 완전히 살아있지 않은 상태 혹은 그 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완전히 죽은 돌을 뜻하는 사석(死石)과는 달리 미생은 완생(完生)의 여지를 남기고 있는 돌이라는 데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는 미생이라는 이름의 두 인물이 있다는 재미난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은 신라시대 화랑 다른 한 사람은 중국 노나라 시대의 인물이다. 신라의 미생은 2세 풍월주 미진부와 법흥왕의 비 묘도부인 사이의 아들이자 미실의 남동생이다. 화랑세기에는 10대 풍월주를 역임했다고 하나 실존 여부는 불확실하다고 나온다. 상당히 똑똑했고 미실처럼 미모가 뛰어나서 많은 여자들이 따랐는데 색을 밝히는 한량으로 부인도 많고 자식은 100명이 넘어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중국 노나라의 인물 미생(尾生)은 순정남이다.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는데 다리 기둥을 안고 기다리다가 비가 많이 내려 불어난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말도 생겼다. 어리석은 죽음이지만 떨어져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 마음은 변함없다는 뜻으로 풀이한다고 한다.

미생은 프로 바둑기사 입단에 실패한 주인공 '장그래'가 고졸 학력으로 종합상사에 낙하산으로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동료 간의 갈등과 동료애를 그리는 드라마다. 드라마는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직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묘사한다.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는 인터뷰에서 "저 큰 건물들 안을 밝히고 있는 직장인들의 생활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미생'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드라마는 결국 바둑에 실패한 장그래의 성장 스토리이기도 하다.

장그래는 입단에 실패했을 때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인 걸로 생각하겠다.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으로 나온 거다"라면서 좌절하지 않고 새로이 세상과의 대국을 시작한다. 회사에서 온갖 인격적 모욕과 냉대를 견뎌내는 그의 저력은 바둑공부를 하면서 매일 적어온 일기에 다 적혀 있다.

'공격의 발상'에서 그는 "위험한 곳을 과감하게 뛰어오르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곳을 외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용기다"라고 적어 놓았다. 이 대목은 "순류(順流)에 역류(逆流)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는 말로 다시 강조된다.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가 최고의 방어수단이자 공격수단이라는 것인데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삶에 대처해야 할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장그래의 내공은 이렇게 우리에게 깊은 공감을 준다.

세상은 무섭다. 아니 우리의 인생 자체가 무섭다.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줄을 잘 서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을 받을지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역사 속의 미생들은 로맨스가 주제였지만 바둑세계의 미생은 불안하고 확실치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혼돈 인간관계의 불투명한 함정 생존경쟁이라는 투쟁의 밀림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고 끝없이 완생을 향해 전진해야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 삶의 해법을 한 수 한 수 함께 대국해 가는 스릴과 서스펜스에 사람들은 드라마 앞에 모여드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