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 / 재미동포 작가

▲ 이기희/ 재미동포 작가

고마운 마음은 겸손에서 시작된다. 세상에서 제일 잘 나고 모든 걸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마움의 참뜻을 알지 못한다.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낮아지고 작아지는 사람은 힘든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끄트머리는 아니라도 내 인생도 빛나고 황홀했던 여름은 떠나가고 가을 햇살 엮어 소슬바람에 펄럭이는 한 폭의 퐁경화를 그릴 시간이 됐다. 순풍에 돛 달지는 못했지만 크고 작은 고통과 괴로움의 고비고비를 파도 타듯 용케도 잘 넘겨왔다고 내 등을 두드린다.

호두 농사를 짓는 농부가 일년 동안만 자기 마음대로 날씨를 바꿀 수 있도록 신에게 간청해 허락을 받았다. 햇볕을 원하면 해, 비를 원하면 비가 내렸다. 바람 천둥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나무그늘 아래서 낮잠만 자고 놀았다. 이윽고 추수할 때가 되어 대풍년에 감격한 농부는 기쁨에 벅차 큰 호두알을 깨트렸는데 호두는 모두 빈 껍데기. 농부에게 "고난이 없는 것에는 알맹이가 없고 폭풍과 시련, 가뭄의 고통이 있어야 껍데기 속 영혼이 여문다"라고 신은 대답한다.

나는 올 한 해 동안 여러 힘든 일들을 겪었다. 별일 아닌 사사로운 일에 연루돼 인격을 모독 당하고 평생 처음으로 피해자의 입장이 돼서 굴욕과 수치를 감수했다. 그동안 기득권자의 편에 서서 너무 많이 누리고 본의 아니게 가해자의 입장에 서진 않았을까? 세상을 바꾸는 일, 권력에 항거하는 일, 단체에 올바로 봉사하는 일, 옳고 바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수식어인지도 깨닫게 됐다. 온건주의와 실리주의를 앞세워 비겁할 정도로 낮아지고 작아지고 헤매였다. 소통과 화해를 기치로 두마리 토기 잡는 흉내를 냈지만 속을 뒤집어보면 남의 입에 안 오르겠다는 알팍한 소시민적 처세술과 손 안대고 코 풀겠다는 보신주의가 깔려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안다. 내 영혼 속에 뿌리박힌 정의와 진리에 대한 믿음은 결코 죽지 않고 활화산으로 뜨겁게 용솟음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깨닫는다. 이 모든 모순과 악순환의 한 가운데에는 내 끝간 데 없는 자존심과 내가 남 보다 낫다는 하황된 착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 헛된 망상이 생의 작은 고마움마저 잊게 했다는 것을.

장마 때 큰 물에 소와 말이 떠내려 가면 소는 살아남는데 말은 익사한다. 말은 헤엄을 잘 친다고 자만해서 물살을 거스르고 후퇴와 전진을 거듭하다 지쳐서 죽는다. 소는 물살을 안 거스르고 떠내려 가다가 강가의 얕은 모래밭에 이르면 기어나와 살게 된다. '우생마사(牛生馬死)'의 이야기다.

'마음을 아끼되 넘 꼭 꼭 숨기지는 말고/ 그 마음을 숨기되 넘 차갑게는 살지 말고 뭐든 때가 있다고 하니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 주는 사람과/ 나로인해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사람은…' 끝간 데 없는 내 하소연을 잘 들어주는 지인이 보내주신 글이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라도 그런 사람이 곁에 왔을 때/ 세상에 넘 엉켜버려 줄 것을 미처 보이지도 못하고/ 보내지 않도록'하는 대목에는 가슴이 찡해진다.

반성문은 자주 쓸수록 좋다. 썩어가는 영혼에 소금을 뿌리고 독설이 넘치는 입술에 자물쇠를 채운다. 삼성오신(三省吾身), 하루에 세 번이 아니라 백만 번을 반성한다. 빛나는 사랑이 다가올 때 눈 멀지 않도록 맘 속에 독을 빼고 올해의 마지막을 보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