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 중국동포 작가

▲ 홍천룡/중국동포 작가

상전벽해라고 일사천리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오늘날, 여가를 내서 한번쯤은 고향의 산비탈에 올라가 시골풍경을 다시금 눈으로 그려보는 건 어떨까? 만약 그대가 시골에 뼈를 묻으려고 한다면 향수에 젖은 그리움에 사무쳐 가슴이 벅차오를 것이다.

매끈하게 쭉 뻗은 콘크리트 신작로가 꼬불꼬불하던 달구지 길을 대체하고, 파아란 양철기와가 노오란 이영새를 대체하고 있는 마을을 보노라면 그 옛날 고향 모습은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헌데 지금은 이처럼 평탄한 대로가 닦아졌는데도 그 길로 편안하게 손수레를 끌고 가는 농부들은 아주 드물다. 고향의 역사는 늘 이렇게 격식과 내용이 맞물리지 못한 채, 부족과 불편 속에서 아쉬움을 등지고 새장을 펼치게 된다.

광복 전까지는 우리 조선족 농촌사회는 아주 복잡했다. 한 마을에 소작농도 있고 자작농도 있었고 머슴꾼도 있었고 또 남을 부리고 땅을 소작 주는 부농이나 지주계층도 있었다. 땅이 있고 없고에 따라 소득이 달랐겠지만 대부분 농업을 위주로 형성된 관계였고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가족을 토대로 한 사회구조였다. 때문에 가족재산이 주요 경제 토대였고 가족관리가 주요한 사회관리 체계를 이루었었다. 그러한 농촌사회는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없었고 발전이 느리고 농민들의 생활이 크게 향상될 수 없었고 부를 창조할 기회가 적었다.

중국이 해방된 후, 이런 낡은 사회구조를 뒤엎고 가족 공동체 위주의 관리식 농촌사회 구조를 생산소대, 생산대대, 인민공사 등 3가지 등급의 집단공동체 위주의 구조로 바꿔놓았다. 바꾸는 과정이 약 30년이 걸렸다.

이 시기에 분산되고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농민들을 조직하여 집단화의 길로 나아갔는데 이 과정에서 산생된 에너지는 매우 컸으며 농촌사회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왔다.

집단경제가 형성되고 수리시설 면모가 급변하고 농업 과학기술 연구와 보급체계가 구축되고 농촌공급판매합작망이 형성되는 등 기초적인 건설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우리 조선족 농민들은 그 어느 민족보다 우월한 역사에서 마멸(磨滅)될 수 없는 엄청난 공헌을 했다. 예를 들면 토지개혁에 앞장서서 땅을 분배했고 자식들을 군에 입대시켰고, 또 나라에 바치는 공량(公粮)도 타민족보다 훨씬 더 많았고 가정생활 형편도 훨씬 좋았으며 문화적인 향기를 피우며 살았다.

그런데 이런 집단화 방식에는 치명적인 실책이 있었다. 생산 자료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를 실시하면서 농민들의 자원과 자본수입 원천을 끊어놓았고 가정주체성 작용과 농민 개개인들의 능동성을 억제해 계획경제를 실시했기에 시장작용을 등한시했고 농민들이 경영자주권이 없었기에 책임감이 없고 평균주의 분배원칙을 실시해서 농민들의 생산 적극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이 땅에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농촌에서 경작지 가정 도급 경영제가 실시되어 가정주체성 작용이 발휘되면서 농민들의 적극성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거기에 시장경제가 실시되면서 경영자주권을 가지게 되었고 개인 능동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헌데 이런 개혁 정책에도 실책이 있었다. 농민들의 조직성을 등한시 해버렸던 것이다. 도시화 건설 붐에 물가가 상승하고 시장문턱이 높아지면서 농민들 가정주체성 작용이 미약해졌던 것이다. 분산된 가정경영으로는 높아가는 시장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시기에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우리 조선족 농민들에게는 그 가쁜 숨을 확 몰아낼 수 있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한국 노무수출로 농업수입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 노무수출도 이젠 20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의 조선족사회는 많이 변했고 한국진출 노무자와 그들의 가정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변화에 비추어 우리의 몸가짐을 다시 가다듬을 필요가 있게 되었다. 어떤 자세로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어떤 길을 선택해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고 선택하는 길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노무수출이 우리를 가난에서 탈출시켜 줄 수는 있지만 우리를 부유한 민족으로 부상시켜 주지는 못한다. 노무수출만 해서는 한계가 있다. 우리의 앞날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노무수출을 점차 자본송출로 전환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노무수출로 빈곤에서 벗어났고 도시아파트를 구매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의 농촌, 우리 삶의 공동체 터전이었던 고향마을들이 황폐해지고 무너져 가고 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런 고향을 넘겨줘야 하겠는가? 고향의 땅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가 부유한 선진민족으로 부상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농민들이 다시금 조직되어야 한다. 역시 중국농업이 30여년이라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느끼게 되는 문제의 심각성이다. 우리도 20여년이라는 노무수출 과정을 거친 뒤에야 심각해지는 이 문제를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