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 / 대한결핵협회 회장

▲ 정근 대한결핵협회 회장

지난해 12월쯤이던가. 한 방송국의 드라마 PD가 나를 찾아왔다. “내년에 개성공단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했다”며 그동안 개성공단 내 남북협력병원과 관련된 여러 일화를 듣고싶어 했다.

남북한 근로자들을 진료하는 남북협력병원이 문을 연 지도 어느덧 10년이다. 의료봉사단체 그린닥터스는 2005년 1월 개원부터 2012년 12월까지 8년간 개성병원을 운영하면서 남북 근로자 30만명 이상을 무료 진료했다. 개원 초기 개성공단의 남쪽 사람들은 세 가지 고통을 겪었다. 외로움, 무료함, 답답함. 마치 수용소 같은 억압된 공간에서 일과 후 할 일이 없었다. 하다못해 인터넷게임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이른바 북측의 3통(통행·통신·통관) 불허 정책 탓이었다.

그러니 ‘동토의 땅’으로 배워온 북한에서 누가 진료하려 들겠는가. 그것도 자원봉사로. 우여곡절 끝에 밟은 북한에서의 냉랭함은 역시 예상대로였다. 북측 관리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한데 북측 인식이 바뀐 건 한순간이었다.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성시 인민위원회 고위 간부가 한밤중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우왕좌왕하면서 응급조치를 원하는 북측 관계자들 앞에서 의료용 고압산소로 그를 살려냈다. 그들에겐 기적(？)이었다.

그린닥터스를 통해 많은 이들이 북한 땅을 밟고 그쪽 주민들을 접했다. 가난한 북측 사람들의 삶을 접하고는 이내 빠른 통일을 기원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특히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비쩍 마른 어린 군인들이 제 키만 한 총을 무겁게 어깨에 둘러멘 모습에서 두려움보다는 측은지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한 여학생의 개성공단 방북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벌써 7년 전의 일이었지만, 드라마틱한 내용이어서 그 PD에게 들려줬다. 꿈이 의사인 그 여학생은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개성병원을 방문했다. 그녀는 단 하루의 경험담을 그린닥터스 개성병원 1000일 보고서인 ‘부산발 개성행 통일앰뷸런스’에 털어놨다.

“… 난 이번에 개성병원을 다녀오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우선은 북한 사람들은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우리가 그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뿐이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통일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개성에 가기 전에는 통일이라는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는 밖으로나 안으로나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개성에 가보니 우린 아주 가깝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개성병원에 있던 (북한)간호사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 오빠가 군대에 가 있다고 말하자 그 간호사 역시 자기 동생도 군대에 가 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서로 웃으면서 할 때는 정말 슬펐다. 우리는 이렇게 웃으면서 잘 지내고 있는데, 뒤에선 서로 싸우기 위해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개성병원은 단지 환자를 치료하는 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와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다음에는 군대 가 있는 형제가 2년 뒤에 나온다는 말보다는 2년 뒤에 함께 여행을 가자는 말을 나누기를 꿈꿔 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지만 남북 관계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되레 새해 정초부터 한반도 상황이 냉온탕을 오간다. 남북끼리는 대화 분위기를 띄우는데, 미국은 대북 제재 카드로 초강경 자세다. 한때 한반도 평화의 전진기지라는 평을 받았던 개성공단을 드라마로 만들려는 이유 또한 답답하기만 한 현재의 남북 관계를 누그러뜨려 보려는 염원에서 비롯됐을 게다. ‘통일 대박’을 위해 남북한 당국자들도 드라마 같은 상황을 연출해볼 순 없을까. 부산발 개성행 통일앰뷸런스의 힘찬 평화 사이렌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