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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團 東京本部 김수길(金秀吉) 단장은 말한다
이구홍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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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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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단 동경본부 김수길 단장.
지난해 11월 26일 민단 동경본부 김수길(金秀吉) 단장과 인터뷰가 잡혀 김포공항에서 아침 8시 비행기로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김유철 군의 안내로 민단 동경본부가 있는 니노하시(二ノ橋)로 향했다.

그동안 해외교포문제연구소 간판을 짊어지고 숱하게 東京을 드나들면서, 민단 인사들에게 많은 신세를 진바 있어 이번에는 아주 점심식사를 마치고 방문하기로 하고 근처의 어느 식당에 들어가 튀김요리를 시켰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계산대에 서니 나를 안내한 김유철 군이 이미 지불했다고 한다.

필자는 그의 손을 잡으면서 “나는 평생 민단 사람들한테 신세만 짓다 죽을 팔자”인지 모르겠다고 고마움을 대신하자 김유철 군은 “그런 팔자라면 저한데도 조금 나눠주세요.”라고 응수해 한바탕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날 동경거리는 초겨울답지 않게 궂은비가 몰아쳤다. 약 5분쯤 걸으니 낯익은 민단본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또한 예외 없이 일본 우익들, 소위 재특회(在特會)라는 사람들이 민단 건물 맞은편에서 대형 스피커를 앞세워 섬뜩한 구호를 내뽑고 있었다.

“천황폐하 만세” “고유영토(독도)를 수호하자” “재일조선인 (한국·조선)들은 다 내몰아쳐라” “조선의 위안부들은 다 창녀들이었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필자는 최근 동경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일본 우익들의 반한(反韓) 혐한(嫌韓)의 가두시위를 목격한 바 있어 그 배경과 목표가 무엇인지 관심이 많았다. 또한 이들의 반한 구호에 왜 민단은 무대응으로 일괄하고 있는지도 의아했다.

이에 대해 도쿄가쿠게이대(東京學藝大學) 이수경 교수는 “과거 일본 군국주의가 아시아 최고의 열강으로 중국과 한반도 등을 통치했던 암흑의 시대를 일본의 화려했던 시대로 동경(憧憬)하며 호전주의 전쟁놀이처럼 재일동포들을 짓밟는 언어폭력을 쾌감으로 즐긴다.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 ‘떼쓰기’를 합리화 하는 이기성이 드러나는 행위”라고 진단한다.

   
 
필자는 착잡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民團 東京本部에 들어섰다. 낯익은 얼굴들이 그대로 민단을 지키고 있었다. 20수년간 東京本部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문길(鄭文吉) 사무국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오영석(吳永錫) 부단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내민다. 吳 부단장은 신주쿠 일대에서 ‘처가방’이라는 음식점을 연 분이다.

‘처가방’은 단순한 한국 음식점이 아니라 이곳에 가보면 한국의 문화재를 옮겨놓은 듯 착각이 들 정도로 전통문화 음식점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궁중요리 차림의 그릇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金秀吉 民團 東京本部 團長과의 약속시간 2시가 되자 백발의 노신사가 들어선다.

⊙ 金秀吉 단장은 지난 40수년간을 민단 현역으로 활동 중인데 민단에 투신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저는 종전(終戰)이 되기 3년 전에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해방이 되자 저를 데리고 고향인 제주도로 귀향하셨지요. 제주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 동경한국학원을 다녔고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을 마쳤지만 조선인 신분으로는 취직할 곳이 없더군요. 그래서 부친이 운영하던 철공장에 다니면서 사업이라는 것을 시작했지요. 그 후 비닐공장을 10여년 하다 보니 약간의 돈을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때 아라카와(荒川)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곳은 1만 2천여명의 조선인이 살았습니다. 그 중 삼분의 이는 총련 사람들이었고 총련학교 중급1호 학교가 여기에 있던 곳입니다. 말하자면 총련의 아성(牙城)이었던 곳입니다. 하루는 민단 아라카와(荒川) 지부 단장이 불러 가니 대뜸 ‘자네가 청년회를 조직하여 민단에 힘을 보태주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재일교포 北送事業이 시작되어 民團 對 總聯의 투쟁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였다고 했다.

“청년 회장이 하는 일이야 동지 몇 명이 모여 밤새 가르방을 긁어 ‘北送반대 삐라’를 가두에 뿌리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저들이 ‘北은 地上樂園’이라는 삐라를 뿌리면 우리는 ‘너희들이 가보았냐?’라는 맞대응에 나섰지요. 그런데 난데없이 본국으로부터 교포들한테 징집영장이 날라드는 거예요. 그러자 總聯은 이를 호재로 삼아 ‘재일동포들은 전부 군대에 끌려간다’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했지요. 이 선전이 당시 재일동포들에 상당히 어필했던 것입니다. 약 10만에 달하는 재일동포가 北送되었는데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재일동포사회는 總聯의 攻勢的 위치가 형성되었고 민단은 守勢에 급급했으며 오늘날 總聯이 崩壞되지 않고 버티는 理由가 됐다고 나는 지금도 믿습니다.”
   
▲ 2013년 3월 23일에 당선된 민단 동경본부 3기관장. 왼쪽부터 남조남(南照男) 의장, 김수길(金秀吉) 단장, 이수원(李壽源) 감찰위원장.  ⓒ 민단 동경본부

⊙ 團長님 말씀대로 민단의 대 총련 투쟁에서 밀리던 시기에 民團을 했다면 고통도 많았고 후회되는 일도 있을 법한데요.

“저를 비롯해서 그 당시 민단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後悔’된다는 사람은 못보았습니다. 당시 재일교포들은 명색이 해방 민족이었지만 일본에서 제대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배고프고 고생길이었으나 민단에 나가서 일한다는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해방의 감격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조국에서 발발한 6·25전쟁은 이러한 재일교포들의 희망을 하루 아침에 재를 뿌리는 것이었지요.”

민단의 역사는 한국의 건국과 맞닿아 있다. 아니 한국정부 수립 이전에 민단은 일본의 한복판에 세워졌다. 그러나 재일동포사회는 3·8선의 분계선이 없는 곳에서 남북대리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것도 南으로부터는 ‘보릿고개’란 비참한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北으로부터는 ‘祖國建設’이라는 우렁찬 소리가 들려오는 속에서 民團 對 總聯의 대결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 최근 韓商聯 등 民團에 대해 교포사회는 물론 본국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저도 그런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韓商聯 관계로 약 3년간 끌고 있는데 참 답답합니다. 이사장,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民團은 태생(胎生)적으로 朝總聯과 투쟁하는 단체로 탄생했습니다. 투쟁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모여서 우리의 主張을 펼치는 것 아닙니까? 우리 민단만 해도 北送鬪爭, 韓日會談투쟁, 永住權투쟁, 總聯系 母國訪問 투쟁 등을 통해 民團員들의 結束力을 지켰고 正體性을 확립하면서 커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을 모을 만한 動力이 사라진 것입니다. 얼마 전(11월 8일) 東京의 희비야공원에서 ‘韓·日 交流의 마당’이라는 場을 펼쳤는데 2천700여 명이 모였습니다. 참 오랜만에 조직이 꿈틀댄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要는 조직은 사람을 모이게 해서 여기에서 動力을 찾아야 합니다.”

金秀吉 단장은 民團 조직의 산 증인이다.

이분 말씀가운데 우리 본국인들도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도 따로 있었는데 다 쓰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 다만 民團 育成은, 民團에 대한 非難은, 민단만이 책임질 몫은 아닌 듯 싶다.
金秀吉 단장과의 대화는 저녁 7시, 吳永錫 부단장이 經營하는 ‘처가방’에서 이어졌다.
民團에 대한 未練, 悔恨, 抱負로 이어갔다.

金秀吉 단장이 民團에 남아있는 미련은 단 한가지, 3·4세로 접어든 民團의 내일에 민단 청년들을 불러내 자리를 넘겨주는 일을 못다한 悔恨이 남아있는 듯 했다. 그러면서 大韓民國이 있기에, 分斷된 祖國이 있기에, 民團은 永遠히 存在해야 할 民族團體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民團은 민단 그 자체만으로 소기의 일을 다 할 수 없는 단체라고 말할 때에는 역대 한국정부의 재일동포 대책이 제대로 서있기나 했느냐는 반문의 소리로 들렸다.

金 단장은 東京本部 監察委員長, 議長, 副團長 2기를 거쳐 團長에 오른 정통 민단맨이다. 민단을 오랫동안 지켜온 조직인들의 공통점 하나가 따로 있다면, 민단을 비판하는 인사가 재일동포이든 국내 인사가 되던 “너희들이 민단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하는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金秀吉 단장은 말한다. “우리 민단을 지켜온 조직인들은 자기 돈 쓰고 시간 허비하며 오직 고향과 조국을 바라보며 평생을 봉사해 왔다는 자부심 하나 가지고 살아왔다”고.

金秀吉 단장은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있다고 했다. 장남 김명언(金明彦 45세)군은 민단의 지부 부의장을 맡아 일한 바 있으며 둘째 승언(勝彦 44세)군, 삼남 봉언(峰彦)군은 부친의 사업을 잇고 있다고 했다.

대담/이구홍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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