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오 / 전 호주국립한국학 연구소 수석연구원, 커뮤니케이션 박사]

독서에서 얻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가운데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하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타인을 만났을 때 갖는 연대감입니다. 한국에 있으면서 요즘 읽고 있는 ‘역사와 책임’(부제, 바로 잡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한홍구 교수 저. 4월 한겨레 출간)이 그런 책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요? 먼저 제가 15년 전에 쓴 ‘언론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2001년, 한울 출간, P. 101)에 실린 다음 부분과 한 교수의 글 일부를 소개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 일본 통치로부터 벗어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으나 끝나지 않는 친일파 논쟁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다. ‘친일파 99인, 청산하지 못한 역사’ 등의 책을 발간하여 이 논쟁에 다시 불을 짚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하고 있다.

–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반세기 전의 과거를 따져야 한다면 불과 얼마 전의 잘못된 역사는 더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는 외세에 어용을 했으니 그렇게 나쁘고 다른 하나는 국내 세력에 어용을 했으니 괜찮다는 말인가. 국내의 불순세력이 사회에 주는 피해는 내부로부터의 침략이며, 결코 외세의 침략보다 덜하지 않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와야 한다면, 반민족, 반민주 정권에 붙어 우리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끼친 기회주의 학자, 언론인, 그 외 지식인의 인명사전도 만들어야 한다. –

한홍구 교수가 위 책에서 쓴 비슷한 이야기 일부만을 전재해보겠습니다 (PP.6-7).

– 김기춘에 대한 글을 쓸 무렵 나는 주변으로부터 독재시기에 체제 유지를 위해 고문과 조작을 일삼은 자들의 행적을 담은 독재인명사전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권유를 받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작업 자체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그 일을 ‘사전’ 형태로 정리하는 것에는 강력히 반대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는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이미 죽어버린 상황이었지만, 독재 시절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당장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만 보더라도 살아 있는 권력자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독재의 편에 서서 헌법을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한 자들의 명단이야 언젠가는 사전 형태로 정리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사전을 목표로 자료 정리를 시작하는 것은 독재 세력 출신들이 오늘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엄중한 현실에 비추어볼 때 한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김기춘 등 과거 독재 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면서 지금도 핵심적인 또는 상징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전이 아닌 ‘열전’을 만들 준비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이 책에 실린 “김기춘뎐(傳)”은 그런 작업의 필요성과 기능성을 나 스스로 확인해보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그리고 3년 전인 2013년 저는 호주한국일보(7월26일자)에 같은 연장선에서 “왜 친일파 단죄와 인명사전만이 그리 중요한가”란 제목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 나는 한 때 정치범으로 곤욕을 치른 인사들에 대한 최근 계속되는 재심, 무죄 판결, 국가 배상 보도를 보면서 몇 개월 전부터 이 글을 쓸 요량으로 있던 중 ‘한겨레신문’ 정남구 특파원의 칼럼(2013년 7월 12일자) ‘민주. 인권 유린자 인명사전 만들자’를 읽고 더 미루지 않기로 했다 – (중략)

– 60대 이상의 한국인이면 대부분 잘 기억하는 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야당 정치인 조봉암씨,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씨, 타살 의혹을 밝히기 위한 묘지 개장이 유족과 관련 단체에 의하여 불과 얼마 전 실시된 장준하씨다.

– 그 사이에 비슷한 이유로 목숨을 잃은 인사가 더 있고, 억울하게 누명을 써 옥고를 치르고 나서 인생이 절단 난 피해자는 부지기수다. 국가는 재심의 기회를 통하여 이들에게 명예회복과 피해 보상을 해주고 있어 얼마 전부터 그에 대한 보도가 연재처럼 언론의 지면과 공간을 채우고 있어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 (중략)

– 그렇다면 문제는 피해자들이 넉넉한 금전 배상이나 보상을 받았으니 이제 그것으로 이 불행한 시대적 사건은 종지부를 찍게 되어야 하느냐이다. 각본에 의한 증거조작과 잔악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그에 따른 엉터리 선고 공판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은 경찰, 각종 공안 요원, 판검사는 가만히 앉아 굿이나 보고 잠자코 있으면 되는 건가? 그럴 수는 없겠다. – (중략)

-가해자들 가운데는 먹고 살기 위하여 자리를 떠나지 못한 딱한 말단들이 있었을 것이다. 요직에 앉은 대부분은 그것도 아니었다. 독재정권은 주요 인사의 충성을 우선으로 하고 충성한 자에게는 후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충성은 나라가 아니라 이른바 출세를 위해 하게 된다. 그 때 챙긴 기득권과 재력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는 기회주의자가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내버려두고 국민의 혈세로만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 또한 크게 형평에 안 맞는 일이 아닌가.

– 하지만 나는 부질없는 탁상공론을 하고 있음을 잘 안다. 현실적으로 실천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더 큰 그림을 그려 그 불법, 부당 행위에 가담한 사람들이 ‘누가 누구인가 (Who’s Who)’의 이름만이라도 밝히기 어렵겠지만 절대 필요하다. 전두환씨 일가의 불법 축재가 지금까지 큰 국가적 이슈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중략)

– 특히 한국의 사법부를 이끄는 판검사들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이들은 아무나 갈 수 없는 일류 법과대학 시절과 사법고시 준비를 거치는 동안 ‘사법권의 독립’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되 뇌이던 수재들이 아닌가. 그런 엘리트들이라면 정권의 시녀로 마구잡이 재판을 하느니 차라리 신성한 법복을 벗었어야 했다.

– 재심판결에서 한 재판장은 “당시 사법부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점에 진실로 사죄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선배들에 대한 예우로는 몰라도 너무도 뻔뻔한 발언이다. 기록이 있을 테니 고의적인 재판이 명백한 경우 당사자는 국민 앞에 석고대죄(席藁待罪)해야 옳다. – (중략)

– 5.16으로 시작, 불과 얼마 전까지 맥을 이어온 군사정권의 공과에 대하여는 국론 일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아무래도 당사자와 관련자들 대부분이 실세로 살아 있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이 논쟁도 친일파들의 경우처럼 당사자 들이 무덤으로 갈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될까.

개인 홍보가 필요해서 과거 글을 전재하는 게 아닙니다. 아직도 이게 한국사회 문제의 본질이며 숙제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저의 글에 다른 사람의 호응은 물론 인용이나 어떤 언급이 고국과 시드니에서도 전혀 없었습니다. 저명인이 아닌 사람이 군소 매체에 쓰니 그렇겠지요. 그러나 저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그간 많아졌고 그런 사회 분위기가 대세가 되었더라면 ‘세월호’를 침몰시킨 관피아나 음흉한 ‘성완종 리스트’가 고개를 들고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