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노컷뉴스 자료사진

일본인이 과거 한국 국적을 갖고 있을 때 겪은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국가배상법이 정하는 '상호보증'이 있기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가 인정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간첩 혐의로 불법 연행된 뒤 가혹행위를 당했던 일본인 허모(72)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정부는 허씨에게 1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의 국가배상법 내용이 유사하고, 한국 국민이 일본에서 국가배상청구를 할 경우 그 청구가 인정될 것이 기대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본에서 한국 국민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가 인정되고 있다"며 "허씨가 한국 국적을 잃었다고 해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국가배상청구에 대한 상호보증이 있으므로 국가배상청구권이 상실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국가배상청구권의 발생 요건과 상호보증 등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국가배상법은 실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며 "국가배상법상 상호보증은 외국의 법령과 판례 등에 의해 발생요건이 인정되면 충분하고, 반드시 국가간 조약이 체결될 필요는 없으며, 외국에서 구체적으로 우리 국민에 대한 국가배상청구를 인정한 사례가 없더라도 '인정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상태'로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국가배상법이 정하는 '상호보증'의 의미와 그 요건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판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전했다.

대한민국 국가배상법 제7조(외국인에 대한 책임)는 '이 법은 외국인이 피해자인 경우에는 해당 국가와 상호보증이 있을 때에만 적용한다'고 규정한다. 일본 국가배상법 제6조도 '이 법률은 외국인이 피해자인 경우에는 상호보증이 있을 때에만 이를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허씨는 1943년 일본에서 태어나 오사카대학에 다니다가 1973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그는 1975년 10월 서울대병원 기숙사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게 영장 없이 연행된 뒤 구타와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거짓 진술을 했다.

검찰은 1975년 12월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간첩, 반공법상 잠입 등 혐의로 허씨를 재판에 넘겼다. 검찰이 적시한 혐의는 허씨가 조총련 자금을 지원받아 대남적화통일을 위해 활동하는 한국민족자주통일동맹에 가입해 국가 기밀을 수집·누설했다는 것이었다.

허씨는 1·2심에서 징역 3년6개월에 자격정지 3년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은 1976년 12월 "자백 외에 증거가 없다"며 사건을 파기환송했고, 서울고법은 1977년 2월 허씨를 보석으로 석방한 뒤 1979년 1월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7월 "국가가 허씨를 장기간 불법구금하고 가혹행위를 한 점에 대해 사과와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2006년 일본으로 귀화했던 허씨는 2011년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심은 "허씨가 대한민국 국민이었을 때 국가의 불법행위가 발생한 만큼 한국 국적을 상실했다고 해서 국가배상청구권을 잃는다고 볼 수 없다"며 "국가는 허씨에게 3000만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2심은 "통화가치 변동, 유사한 사건에서 인정된 위자료 금액과의 형평성, 허씨의 가족관계 등의 사정을 종합해 허씨에 대한 위자료를 1억원으로 정한다"며 배상 액수를 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