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혜 / 도쿄 특파원

뭔가 이루려고 간절하게 노력할 때 한국인은 뜨겁거나 맵다는 개념을 쓴다. '열심히 산다'는 말은 '뜨거운 마음'(熱心)으로 산다는 뜻이고 '치열하게 산다'는 말은 '불 사르듯(熾), 맵게(烈)' 살아간단 뜻이다. 일이 수월하게 이뤄져 흡족할 때도 우리는 '화끈하다'고 한다. 국어사전을 보면 화끈하다는 말은 '몸이나 쇠가 뜨거운 기운을 받아 갑자기 달아오른다'는 뜻이라고 써있다. 일본인은 다르다.

이 사람들은 '열심히 한다'고 할 때 '간바루(頑張る)'라고 한다. 완강하게 버틴다는 의미다. 이 말엔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뉘앙스가 없다. 오히려 반대인지 모른다. 너무 달아오르면 오래 버티기 힘들다. 마음이 차고 맑게 가라앉아야 제자리를 굳세게 지킬 수 있다. 이들은 '잇쇼켄메(一生懸命)'란 단어도 쓴다. 그 일에 생을 건단 소리다. 일본 기자들에게 "당신들은 뜨겁다는 개념은 안 쓰느냐"고 물어봤다.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전을 뒤진 끝에 온도 개념이 들어간 표현을 하나 찾기는 했다. '돌 위에 3년'이란 속담인데, 제아무리 차가운 바위라도 3년 동안 그 위에 앉아 있으면 어지간히 따뜻해진다는 의미였다. 한국식 뜨거움과는 장르가 달랐다.

나는 한국인이다. 뜨겁고 맵고 직선적인 게 좋다. 그래도 일본식 '간바루'의 미학에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다. 가령 며칠 전 도쿄 도심에 있는 오래된 클럽 켄토스에 갔을 때, 처음엔 우습고 중간엔 흥겹고 나중엔 찡했다.

왕년의 엘비스 프레슬리 스타일로 앞머리에 사과 한 알은 들어가게 왁스를 바른 6인조 록밴드가 나왔다. '아버님' 소리가 어울리는 어르신 밴드였다. 이들이 1950~60년대 스탠더드 올드팝을 불렀다. 미국에서도 이미 사라지고 없을 풍경이 2015년 초여름 도쿄에서 펼쳐졌다. 진풍경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진풍경을 지속해온 힘에 생각이 미치자 찡했다. 이 클럽은 1980년대 처음 생겼다. 그때 이미 40대가 자기 아는 노래를 편히 들을 수 있는 '복고풍 라이브'를 표방했다. 그 뒤 한 세대가 지났다. 버블이 왔다 가고 불황이 왔다 갔다. 아베노믹스가 왔다 또 갈 것이다. 긴 세월 함께 늙은 밴드와 단골이 늘 부르던 노래를 이날 처음 부르는 것처럼 열창했다. 일본을 깊이 아는 분이 이 가게에 가보자고 이끌었다. 왜 그랬나 알 것 같았다.

후지산 밑 하코네에 후지야라는 137년 된 호텔이 있다. 그곳에 하룻밤 묵을 때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고색창연한 누각 앞에 차를 세우자, 유럽 출신 금발의 벨보이가 나타나 짐을 날랐다. 메이지 시대에 지은 일본식 서양 건물 복도에 한때 여기 묵은 사람들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찰리 채플린도 있고 헬렌 켈러도 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있었다.

한국이 빈한한 식민지일 때 일본엔 이미 이런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울 게 없었다. 뜨거운 한국인답게 잠시 분개하고 또 쓸쓸해하기는 했다.

이 쇠락해가는 호텔이 놀랍고 무서운 점은 따로 있었다. 구불구불한 복도를 따라 걸려 있는 수많은 사진틀이 먼지 한 점 없이 반들반들했다. 습기찬 숲 속에 있건만, 호텔 안 어딜 가나 목제 창틀은 비틀어진 곳 없이 반듯하고, 한 세기 전에 붙였다는 화장실 타일이 어제 붙인 것처럼 말쑥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앞으로도 오래 경쟁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