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미 / 논설위원

1945년 3월 미군의 일본 고베 대공습 당시 자이이 아사코는 17살이었다. 불바다 속에 겨우 목숨을 건진 자이이 가족은 남의 집 헛간을 빌려 살았다. 당시 공습으로 숨진 이가 8800여명, 부서진 가옥이 15만채에 달했다. 자이이 남편은 폭발사고로 중상을 입고 평생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의 참화를 자이이 할머니(87)는 손편지에 담았다. 수신자는 아베 신조 총리. “당신은 진짜 전쟁이 뭔지 모른다. 다시 한번 자녀들이 전쟁으로 상처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베 총리가 중의원에서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만든 안보법제를 강행 통과시킨 뒤 반아베 여론이 들끓고 있다. 산케이신문 같은 극우 매체에서도 아베 내각 반대 여론이 과반을 넘었다. 아베 안보정책, 역사관 등을 지지해온 산케이 여론조사에서 반대여론이 지지 답변보다 많았던 결과는 2012년 12월 아베 총리가 재집권한 이후 처음이다. 안보법제 폐지를 요구하는 거리 시위에 사람들을 쏟아져 나오게 만든 건 ‘전쟁의 두려움’이 아닐까.

자이이 할머니 세대는 전쟁을 몸으로 기억한다. 영화나 책으로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경험이다. 정치는 ‘높으신 분’들이 하는 걸로 알고 무지렁이로 산 할머니가 총리에 손편지를 쓰기로 작심한 것도 전쟁의 기억 때문이다. 전후세대에도 전쟁이 두렵긴 마찬가지다. 지난 17일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우리는 아무도 전쟁 따위는 원치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집회를 이끈 모임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SEALDs)’. 1970년대 대학가를 뒤덮은 학생운동이 퇴조한 뒤 정치 현안에 학생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안보법제 반대시위 현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손팻말이 ‘아베 정치를 용서하지 않겠다(アベ政治を許さない)’이다. 논픽션 작가 사와치 히사에의 아이디어로, 95살의 시인 가네코 도타가 붓글씨로 썼다. 일본의 평화헌법 체제를 허무는 아베의 신군국주의 행보가 전쟁세대, 전후세대를 하나로 묶어 놓은 셈이다. “전쟁을 겪어본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평화가 흔들리고 있다고 느낀다.” 자이이 할머니의 말은 일본 식민의 역사, 6·25전쟁의 아픔을 겪은 우리에게도 울림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