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修京 / 도쿄가쿠게이대 교수

야마구치서 본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단면

큐슈 출장을 갔다가 야마구치(山口)에 들렀다. 전에 직장이 있었던 곳이라서 옛 동료들과 제자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올 해 야마구치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시설이 있어서 확인도 할 겸 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한국서 아주 가까운 야마구치를 간단히 소개 하자면,

1. 야마구치는 부산서 부관훼리로 값싸게 오갈 수 있는 가까운 이웃이다.(10만원 이내로 2박 3일 왕복을 할 수 있다고 한다)
2. 나당 연합군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 시, 수많은 백제 귀족들이 건너가서 개척한 곳이기도 하여, 야마구치시는 백제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3. 야마구치는 이토 히로부미나 일본 징병제 도입과 군대 정비를 하며 패망까지 군인들의 정신적 지침이 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공포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 가츠라･태프트 밀약의 가츠라 다로(桂太郎）를 비롯, 키시 노부스케[岸信介]나 그 동생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그들의 외손주인 아베 신죠 현 수상까지 포함하여 근대부터 현재까지 많은 수상 및 정치가들을 배출한 곳이다. 그렇기에 명성황후 살해사건 및 한일강제병합을 포함한 우리의 근대사와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지역이다.
4. 일제 강점기 때 우베 쵸세이 탄광을 비롯, 야마구치 곳곳에는 한국에서 건너 간(돈벌이를 찾아 바다를 건넌 노동자), 혹은 전쟁 말기의 강제징용 등으로 간 노동자들의 애환도 서린 곳이고, 그들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5. 올 해 NHK 대하드라마 '花燃ゆ~(꽃이 타오른다)'의 주인공은 이토 히로부미 등의 근대 정치가의 스승이자 일본 수상들도 개혁가로 존경을 하는 요시다 쇼인의 여동생 '후미(文)'라서 야마구치는 일본 국내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을 것이다.
6. 2015년7월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메이지의 산업혁명(明治の産業革命)'이라는 이름으로 나가사키, 후쿠오카, 야마구치 등의 8개 현 23개 시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 중의 몇 개가 하기시에 있기에 근대 사적이나 하기도자기나 어촌 풍경 뿐이 아닌 세계유산으로도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수업자료도 모을 겸 오랜만에 야마구치를 찾았다. 근대 메이지 유신의 궐기장소인 야마구치시내 마츠다야(松田屋)라는 온천여관 근처에서 지금은 야마구치의 대학 총장이 되신 선배와 아시아 세미나 하우스의 권오정 이사장님과 아사히신문사 재직 때 필자와 우베 쵸세이 탄광(후술)을 조사했던 제자와 함께 재회를 즐긴 뒤, 하기시(萩市)로 향했다. 마치 천혜의 요새처럼 깊은 산들로 첩첩이 쌓여진 꼬불길을 한참 달리다보면 어촌의 하기시가 나오는데, 매번 느끼지만 하기는 산과 바다와 성과 마을이 오밀조밀하게 어우러져 아낙의 치마폭 속에 가려져있는 미니어쳐 마을 같은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일본을 뒤흔든 메이지 유신의 인물들이 났으니, 풍수지리설은 모르지만 산세 수세가 대단한 지역임은 틀림없다.

필자는 우선 근대사의 현지 조사 때 자주 다녔던 길을 따라 수많은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가르쳤던 쇼카손쥬쿠(松下村塾)에 들렀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화젯거리로 상당히 번잡할 줄 알았는데 금방 주차할 수 있었다. 관광단체나 몇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으나 한적한 편이었고, 역사 설명을 하는 가이드에 심취하여 근대사를 즐기고 있는 관광객들은 여유롭게 보였다.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어릴때 공부했던 엔세이지 절이다.

미국의 페리제독이 1853년에 구로부네(黒船)를 이끌고 일본에 왔을 때 문화적 충격을 받고 해외 유학을 결심한 요시다 쇼인이 밀항을 시도하다 체포･유폐되면서 1857년부터 계승한 쇼카손쥬쿠라는 사설 학원. 그 주변에 세워진 각종 요시다 관련의 신사, 기념비 등을 전부 돌아보기엔 그다지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참고로 하기시에선 하기의 다섯 개의 세계유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일본은 막부 말기부터 겨우 반세기 사이에 제철, 철강, 조선, 석탄 산업에 있어서 급속한 산업화를 달성하고 비서구지역에서는 최초의 산업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 극히 의의있는 특필해야할 드문 일로서 이 역사적 과정을 시간축에 따라서 나타내고 있는 것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입니다.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은 헤이세이27년(2015년) 7월에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이 유산군은 큐슈・야마구치를 중심으로 8현11시에 23의 자산이 있습니다.
하기 지역은 시대순으로 첫번 째 지역으로 하기반사로(萩反射炉), 에비스가하나조선소자리(恵美須ヶ鼻造船所跡), 오오이타야마 다타라제철유적(大板山たたら製鉄遺跡), 쇼카손쥬쿠(松下村塾), 하기죠카마치(萩城下町)의 다섯 개 자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하기시 공식웹사이트, 2015년8월4일 열람)

지자체 살리기 소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하기는 조선 도공 이경의 후손인 사카 고라이자에몽(坂 高麗左衛問)같은 유명한 하기야키 도자기의 도공이 나온 곳으로 유명하며, 한국의 도예가들과도 교류가 있는 곳이다. 또한 하기지역 특산품 제조회사를 운영하는 재일동포 등, 한국과도 관련성이 많은 곳이다. 아기자기한 근대사의 볼거리도 많아서 산책이나 드라이브를 즐기기엔 괜찮은 곳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바다 풍경을 보려고 가사야마(笠山)를 들렀다. 여수 오동도나 해운대 동백섬처럼 동백꽃 자생군으로 알려진 곳이기에 잠시 걷다가 근처에 세워진 세계유산의 홍보 간판을 따라서 근처의 에비스가하나 조선소자리(恵美須ヶ鼻造船所跡)를 갔다. 이정표대로 갔으나 백대 넘게 들어갈상 싶은 넓은 공간의 주차장엔 겨우 두 대의 차뿐이었기에 주차 도우미에게 물으니, 세계유산은 해안을 따라서 끝자락에 가면 나온다고 하기에 차로 들어갔다. 중간에 동네 사람에게 세계유산이 어디냐고 하니 “아-무 것도 없는데?”라고 한다.

▲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가르쳤던 쇼카손쥬쿠(松下村塾).

별관심이 없나보다 싶어서 길을 따라갔더니 간판 몇 개가 보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란 현장에 갔더니 “허걱!!!”이란 멘붕(멘탈 붕괴)이 올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집터가 하나 나온다. 그것도 땅 위에 기둥구멍이 몇 군데 파인 흔적 외엔 아무런 시설도 없는 공간에 사람이 못 들어가게 줄이 쳐져 있었다.

홍보물을 배포하는 도우미한테 물었더니 거기가 맞다고 한다. 볼 것도 없고, 예전에 세웠다는 자그마한 등대와 둑이 있기에 거기 올랐더니 한 두 명의 관광객만 보인다. 필자를 포함해서 전체 방문객이 3명??

대하드라마의 현장인 하기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 메이지유신의 중심인물들의 출신지,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한 7월의 토요일 오후에 단 3명의 방문객을 기다리는 세계유산이라…

구석진 어촌 방파제에 서성거릴 시간이 없기에 돌아나오다가 주변 동네 아주머니께 여기 세계유산이 어떻게 된거죠? 했더니 “옛날 흔적이 나왔다고 떠들더니 그 위에 살던 사람들 내 보내고 집을 없앤 뒤에 저렇게 공터로 남겨놓았네.”라며 관심 없다는 투로 한 마디 뱉는다. 이런 흔적이 근대 산업혁명군이라고 무리하게 세계유산화 시켜서 지자체 살리기, 자신의 선거지인 야마구치 살리기를 도운 현 아베정권이 왠지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물론 하기시를 돌아보는 한, 매우 퇴색해가는 어촌처럼 보였고, 사람들로 북적거릴 산지특산품 판매장엔 토요일 오후라 해도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 기도 다카요시(木戶孝義) 생가.

중간에 들렀던 다른 세계유산인 하기반사로(萩反射炉, 금속용해로)나 하기성, 유신 3걸 중의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戸孝義)나 기헤이타이(義兵隊)의 군대적 체제를 갖추게 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등의 무사들이 자랐다는 마을을 오랜만에 걸어보았지만 예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살던 집 옆에 어릴적 다카스기 신사쿠나 이토 히로부미가 공부를 했다는 엔세이지 절(円政寺) 앞에 있자니 젊은 커플이 와서는 유명한 사람이 나온 곳이라고 한마디 하더니 그냥 지나간다. 그 곳에서 기모노를 입고 당시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사진을 찍는 남자3명이 사진 촬영을 하기에 나도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해서 찍었는데, 그 마을 긴 골목에서 만난 건 다섯 명 뿐이었다.

물론 사람 없는 그런 날을 택했을 수도 있겠지만, 관광 소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도 관광객이 찾지 않으면 색다른 관광자원 확보와 관광홍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계각지에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을 봐왔던 나로서는 그날 본 유산이 몽상미셸, 옐로스톤, 그랜드캐년, 마츄비츄, 피라미드, 예루살렘, 로마역사지구와 같은 세계유산과 비교할 때 과연 납득할 수 있는 곳일까?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아니, 일본의 다른 세계유산과 비교를 해도 같은 말이다. 예를 들면 히로시마의 이츠쿠시마진쟈(厳島神社), 히라이즈미(平泉), 고도 나라(奈良)의 문화재, 시레토코(知床)반도, 호류지(法隆寺) 불교건조물, 히메지성(姫路城)과 같은 세계유산과 동격 취급이 가능할까? 물론 다양성은 충분히 감안하고 하는 말이다.

근대산업혁명의 흔적치고는 참으로 초라하였고, 그것을 남기기보다 되레 지금부터 화려하게 꾸미고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유네스코가 정하는 세계유산의 의미가 결국 힘의 논리, 돈의 논리이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나라가 관광자원 확보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을 돕는 기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했다. 작년 가을에 가고시마, 나가사키 등의 큐슈지역을 돌아보며 하시마섬(端島,별칭 軍艦島)도, 근처의 조선소도 어떻게 재활용하려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일본의 궁여지책으로 세계유산화 시켰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게다가 유네스코 지원 분담금이 10.8%로 최대지원국인 일본.

유네스코에 일본인 직원이 가장 많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을 지정할 경우, 일본에 유리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공평하다는 말은 상황상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지 사람도 관심 없는 공터까지 세계유산화로 성공시켰고, 되려 일본의 억지스런 모습을 보는 듯 해서 왠지 아베 정권이 모순을 무시한 채 막무가내 처리하는 정치판과 오버랩 되는게 더욱 씁쓰레 하게 만들었다.

다시 찾아간 우베 쵸세이(長生)탄광

석양을 등지며 하기를 뒤로하고 야마구치로 와서 숙박을 한 뒤, 다음 날은 우베 바닷가로 향했다. 야마구치 우베(宇部）하면 모르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글로컬(글로벌 시대의 로컬 문화 발신) 문화의 성공적 사례라 볼 수 있는 지방기업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유니클로 본사가 있는 곳이다.

그 우베의 바닷가 일대에 해저 탄광이 있었고, 그 속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포함한 183명이 해저에서 석탄을 캐다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갱도 안에 매몰된 채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설움의 쵸세이 탄광이 있다. 2010년에 제자와 함께 쵸세이 탄광 조사를 논문(宇部の長生炭鉱と戦時中の朝鮮人労働者)으로 적었던 적이 있어서 들렀더니 [일본을 위하다 숨진 자]란 의미의 ‘순난비’는 퇴색되어가고 있었고, 2013년에 시민들의 양심적 운동에 의해 희생자 추모비 및 추모광장이 설립되어 있었다.

일본은 전시체재 하에서 검은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던 석탄 채굴을 위해 국책으로 탄광산업에 힘을 쏟았는데, 1912년-1967년까지의 우베에 있던 탄전 90% 이상이 해저탄광이었다. 게다가 한국과도 가까워서 영세 탄광업자들은 열악한 환경으로 광부들이 안 모이니 당시 한국에서 모집(모집이 안되자 나중엔 강압적 연행), 착취 노동을 시키다가 1942년 2월 3일에 쵸세이 탄광이 무너지게 되자 사고 직후, 처리를 위해 헌병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갱구 폐쇄를 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도 일본 정부가 노동자, 위안부 문제는 민간업자의 책임이라 하지만, 민간업자가 독단적 행위가 불가능한 전시 상황, 특히 국책산업엔 군부가 관련되었음을 부인하는건 명백한 위선행위임을 알 수 있다.

매몰된 희생자 183명 중 137명이 조선인 노동자였는데 당시 필자가 인터뷰를 했던 이노우에 마사토(탄광 감독)씨나 추모비건립의 중심이 되었던 야마구치 다케노부씨 등 많은 분들이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 당시의 노무주임이나 사무원이 사용하던 목조 건물은 아직도 사용되고 있어서 주거중인 몇 사람과 말을 해 보았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 집 옆의 공터에서 풀을 뽑고 있던 잔잔한 분위기에 깔끔한 이미지의 연로한 여성이었는데, 말을 걸어보니 나이는 80세로, 당시의 이노우에 감독과 친해서 그 댁에 들러서 조선인 탄광부와 야구를 했던 사진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댁과 가까운(3분 거리)곳에 추모 광장이 생겼는데 가보셨냐?”고 물으니 그녀는 신문으로 보기만 했지 안 갔다며 인상이 굳어진다.

예전에 논문자료 수집 때 인터뷰를 많이 했지만 그 당시 못 만났던 분이라 여러 말을 꺼내 봤으나 말을 조심스레 아끼기에 혹시나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바로 쵸세이 탄광주의 장녀 라이손 다케코(頼尊　武子）씨였다.
그렇지만 다시 가서 말을 건다고 해서 일생을 굳게 닫고 살아온 그녀가 중요한 얘기를 해 줄 가능성도 적거니와 팔순의 그녀가 그 현장에 살면서 나름의 자성의 세월 혹은 합리화로 세월을 보냈을걸 생각하니 책망이나 책임을 묻는 당돌함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라서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기회닿을 때 마다 희생자를 위해 근처의 절간에 기도하러 왔었다는 얘기는 이미 듣고 있던 터다.

개개인에 대한 감상적인 기분 보다는 ‘전쟁과 국가범죄’라는 구조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부모의 경솔함 혹은 안이함으로 발생한 사건 사고의 대물림을 받는 자식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생각하였고, 한편으로는 억울히 죽어간 희생자의 비명,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기다리며 가난과 참혹한 생활과 싸우며 고독 속에 살아야 했던 희생자 가족의 울음이 뇌리를 교차하였다.

복잡한 심경으로 옛날 순난비 쪽으로 갔다가 바로 그 옆집의 다카무라씨(80세)와 얘기를 했더니 요즘은 새 추모광장이 생기고 부터는 사람들 발걸음이 거의 없다고 한다. 어릴 때 라이손 다케코씨와 같은 나이라서 자주 놀았다는 얘기, 한국의 교수가 간혹 왔었는데 이제는 안 온다는 얘기 등을 했다.

▲ 쵸세이(長生) 탄광 추모광장.

간 김에 쵸세이탄광 감독이었고, 나중에 순난비를 세웠던 한 사람으로 필자가 예전에 인터뷰를 했던 이노우에 감독 댁을 찾았다. 녹차를 판매하던 그 댁에는 돌아가신 이노우에씨를 찾기보다, 혹시 사진이 남아있는지 물어볼 생각도 있었다. 도로 옆의 이노우에씨 댁은 기억의 그대로였고, 나를 기억하는 그 집 며느리가 잘 계셨냐고 묻는다. 그리고 시아버지는 91세가 되던 3년 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를 기억하는 그 분이 떠나면서 사진같은걸 남긴건 없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는 말 뿐.
하긴 그 며느리가 어떻게 사진의 제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까?

분명한건 라이손씨와 이노우에씨는 탄광 폐쇄 뒤에도 친분을 맺고 있었고, 라이손씨는 쵸세이 탄광 외엔 비교적 솔직하게 얘기해준 편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신뢰관계가 생긴다면 그녀가 가슴 속에 담은 얘기를 해 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결국 시간에 쫓겨 도쿄행 비행기를 타야했다.

전쟁을 만드는 자와 그들을 위해 죽음을 강요받는 자

전시체재하의 탄광산업도, 건설업도, 군수물자 관련자도 민간에게 허가를 했으나 결국 군대의 지배하에 두었고, 그들의 방파제로 존재한 것은 국가라는 거대 권력이었으며, 전쟁이란 국가범죄 속에서 민간기업들이 군부와 결탁하여 사업을 하던 시대였기에 일본어도 모르고 지리적 감각도 없었던 강제노동자나 일본군 위안부 들이 쉽게 국경을 건너 전쟁터나 노동현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거국일체 전쟁이 패하자 정보자료 은폐 작업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역사은폐를 위해 자료 태우기, 자료 없애기로 각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잔인했던 행위를 한 사람을 포함하여 전쟁과 관련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침묵과 기억 지우기로 자신들의 과거를 합리화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역사의 풍화,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자 마치 영화 꾸미듯이 미화시키려는 아베 수상은 자신이 그리는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모순을 진실처럼 무장한 사람들과 더불어 전쟁 파견 및 자위대 군대화로 교전권 확보를 노리고, 군산복합체로 첨단무기 제조 판매 등을 의도하려는 안보법안 성립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전쟁터로 보내서 사람을 죽이거나 죽기위해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라는 아기 엄마들의 반대, 전쟁터서 묻힌 붉은 피를 백의에 묻히기 싫다며 반대하는 의사들, 1만명을 훨씬 넘은 학자들의 반대, 고등학생들의 전쟁 반대 등으로 점차 법안 반대 의식이 사회 전체로 번져나가고 있고, 여당인 자민당내에서도 자신들의 내부 모순을 폭로하는 행위가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소자키 요스케(礒崎 陽輔) 수상보좌관은 “법적 안정성은 필요없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정부의 헌법 해석은 필요에 응하여 바뀐다”란 발언으로 현 안보법안은 위헌이라는 수많은 법학자들의 지적을 인정하는 발설을 한 것이다. 일본은 법치국가를 표방하고 있고, 법치국가란 헌법 위에 사람을 두지 않고, 모든 사회 구성원은 헌법 지배하에 존재하므로 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헌법정신 위에 일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법치국가, 민주국가를 내세우던 일본 사회거늘 아베정권이 헌법 위반을 강행한 꼴이니 이미 법치국가 일본을 부순 셈이 되는 것이다. 이소자키 보좌관은 수상 보좌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와 철회하겠다는 말을 했으나 철회한다고 말하면 무슨말이든 용서가 되는 것이라 착각하는 발상 자체가 경솔한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또 다른 예로 자민당의 무코 다카야(武藤 貴也) 의원은 안보법안 반대를 하는 학생그룹 SEALDs에 대해서, 그들의 주장은 전쟁에 가기 싫다는 자기 중심적이고 극단적인 이기적 생각이라고 트위트에서 지적하였다. 즉, 자민당 의원 스스로가 결국 이 법안 자체가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를 만드는 법안이라는 말을 한 셈이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이지만, 전쟁을 조장한 일부 호전주의 지배자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애국이란 미명으로 전쟁파견대를 늘려가려고 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정치가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전쟁이란 위험구조나 만들고 있고, 국민들은 자신들의 꿈을 위해(명목은 애국이고 충성이다) 목숨을 버리러 가는 구조가 되고 있는 것이다.

패전 이후 그토록 반성을 외치며 두 번 다시 전쟁에 관련되지 않겠다는 국가규모의 맹세로 국제사회에 복귀하여 세계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일본을 순식간에 전쟁국가로 만들어 가는 아베 정권. 아직도 과거 전쟁의 청산조차 제대로 깔끔하게 못한 상황에서 그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남아있건만 또 다시 야욕적인 전쟁 구도를 만들어 내는 그의 무책임함이 향후 일본을 어떻게 만드는걸까?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는 요란스레 세계유산을 꾸미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우베 바닷가 위에 남겨진 해저탄광의 공기구멍이자 채굴된 석탄을 위로 옮기던 피어(Pier)라는 연기통 두 개 속에서 [아이고!! 살려주소!!]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마음이 참으로 불편하였다. 일본의 역사는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걸까??

그나마 필자의 직장인 도쿄가쿠게이대 110명의 교수들이 재학생들과 더불어 전쟁 가능성을 담은 안보법안 반대를 표명했고, 5천명을 넘는 고등학생들 조차 전쟁반대 시위로 국회를 에워싸고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시민이 주인이란 민주주의 의식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낀 것은 다행이라 볼 수 있다. .

아베 정권이 파병하려는 현재의 자위대 대원이란 일본이 패전 후 전쟁과 관여하는 군대를 안 만들고, 교전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약속을 헌법에 넣었고, 그러한 절대 안전 약속을 믿고 입대한 자국보호 봉사대라는 공무원들이고, 가족을 책임질 가장들이며 소중한 개개인의 생명들이기도 하다. 파병하게 되면 자위대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말을 국회에서 인정하는 방위장관이나 각료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며, 탁상에서 말로만 논쟁하는 국회의원들(절대 안전한 장소에서)과 전쟁 찬성자들이 우선 최전선에 나가서 그들이 주장하는 “동맹국과 협력하는 평화사회구축론”을 실천해야 전쟁의 공포가 실감이 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건강한 상태로 귀국한 뒤, 전쟁에 대해 논하는 것이 설득력도 있을 것이고, 국민에 대한 최소의 예의이며, 고액의 혈세로 생활하는 일본의 정치가로 뽑힌 그들의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닐까? 왜 자신들은 최고의 안전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 뿐인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위험지역에 가라고 명령을 하는가? 너무도 안일한 무책임함이 민주주의 법치국가를 전 근대적 봉건주의 체재로 시대역행을 하려한다.

첨단 무기로 무장했던 자위대가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파병에서 귀국한 뒤에 54명이나 자살해 버린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그들의 죽음이 아직도 자신들의 일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이야 말로 가장 안전한 곳에서 죽음의 계획을 짤 것이 아니라 우선 전장터로 나가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죽으러 가는 것이 애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들에게 양심이 남아있다면 되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