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삼

설 명절은 예로부터 최대의 민족명절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수많은 해외나들이와 연해도시로의 진출로 이산가족이 많아지면서 조선족의 설맞이 패턴은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조용하고 단출한 설

물질이 결핍되었던 시대엔 설이 오면 무엇을 먹을 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으로 떠올랐다면 지금은 누구와 함께 설을 보낼 것인가? 이것이 새로운 고민으로 떠오른다.

설이 되면 가장 반가운 것은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만나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해외나 연해도시에서 귀향하는 자식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거꾸로 부모들이 자식들을 보러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

헤이룽장성 상지진(黑龍江省尙志鎭)만 해도 자식이 있는 곳으로 설 명절을 보내러간 부모들이 20여 가구, 부모에게로 온 자식들의 숫자는 불과 5, 6가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한국에 가 있는 자식들이 이전에는 불법체류 단속 때문에 설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올 수 있어도 오지 않는 것은 설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설날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며칠뿐이지만 돈은 계속 벌어야 하는 것이 삶의 현실이다. 그래서 요즈음 한국에서는 설날에 일하면 수당도 높고 상여금까지 두둑이 준다며 설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편 자식들이 먼 외국에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지만 자식들의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피로를 고려해서 일부러 자식들더러 오지 말라고 하는 부모도 있는데 어쩌면 무정한 것 같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들의 훈훈함이 느껴지는 설날이기도 하다.

확인한 바에 의하면 우리 주위에서 설날을 예전처럼 온가족이 모여서 풍요롭게 보내는 가정은 그다지 많지 않다. 농촌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에서도 대부분 조선족 가정은 부부간 혹은 이주간 조촐하게 설을 지내는 것이 보편이다.

지금 우리 조선족들의 설은 좀은 외롭다. 그렇지만 이제 습관이 된 듯 조용하고 단출하게 보내는 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설에도 만나지 못하거나 만나지 않고 헤어져 사는 가족들이 결코 무정하거나 무심해서가 아니고 설뿐만이 아니라 살아가야하는 수많은 날들을 모두 설같이 즐겁고 풍족하게 살기위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하고 소박한 설

한마디로 잘 먹고 잘 노는 것이 설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잘 먹고 잘 논 날을 두고 오늘 설을 쇠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적기반이 있어야한다.

비록 오늘날 전에 없이 우리 민족들의 돈주머니가 불룩하지만 "한해 번 돈의 절반을 설에 쏟아 붓는다"고 하는 타민족들의 통큰 소비에 비해 우리 조선족들의 설맞이 씀씀이는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간단하다.

필자가 3인 가족 한족(중류생활수준)에게 설비용이 얼마나 드는가 물었더니 한번 설을 지내는데 먹거리, 선물, 세뱃돈, 지어 옷을 사는것까지 3천원이 넘게 든다고한다. 그런데 한 조선족가정은 한국에 가 있던 아들 며느리 와 손자손녀 출가한 딸과 사위 외손녀 등 아홉 식구가 모여 설을 지내는데 어린 손자, 손녀에게 세뱃돈까지 포함하여 2천원이면 넉넉하다고 한다.

상지,연수,방정 등지의 조선족가정들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평소의 생활수준 보다 좀 높게 소비할 뿐 별다르게 큰 소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가뜩이나 핵가족으로 가족이 적은데다 우리 민족은 사회관계나 인맥에서도 타민족 보다 아주 조촐하여 설에 올 사람도 적거니와 찾아갈 사람 또한 많지 않고 예전처럼 이웃 간에 술상을 차리는 습관도 많이 사라져 그렇게 많은 음식을 차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은 생활이 좋아 전에는 설날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을 평소에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노인들의 말처럼 "날마다 설명절"인 셈이다. 게다가 설이 되어도 휴업하지 않고 여전히 영업을 하는 곳이 많아서 구태여 금값이나 다름없는 겨울 채소들을 잔뜩 살 필요 없이 그때그때 사다먹어도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고 소박하게 설을 지내는 대신 그 무엇보다 설에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은 건강한 몸과 편안한 마음인데 그것은 아마 지금 우리 주위 사람들 중에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기 때문으로 인식된다.

더불어 지내는 즐거운 설

우리 민족에게 설은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가난한 세월에 우리민족은 음식이라야 고작 쌀밥에 콩나물, 술도 넉넉하지 않은 세월 이었지만 친척은 물론 이웃까지 불러다 적은 음식이나마 나누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놀아야 비로소 설을 설같이 보냈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에 대한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면을 더 추구하는 것이 우리민족 설맞이 특징이 아닐까? 때문에 비록 지금 설을 함께 지낼 사람들이 많지 않아 조금은 외롭고 단출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협동심이 좋은 우리민족은 지금 특별한 환경에서 우리민족 특유의 새로운 설맞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은 설날 외로운 사람들끼리 한데 모여 더불어 설을 즐기는 풍속이 탄생한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사는 바로 노인협회다.

상지시 조선족노인협회에는 올해 80을 맞는 분이 세분인데 그들에게 팔순 축하상을 차려드리고 그분들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윷놀이 등을 조직해 단체로 설을 맞이 한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외로운 노인들이 함께 모여 설을 즐길 수 있도록 정월 초하룻날도 활동실을 개방한다.

지난해 설에도 40ㅡ50명의 노인들이 초하루부터 협회에 나와 제각기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면서 화투도 치고 마작도 놀며 설을 즐겼는데 올해도 특별히 협회에서는 명절날 마실 술을 책임지고 공급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외롭게 설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단체로 설맞이 음식상을 차려주어 더불어 설을 보내는 것으로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새로운 설맞이 문화가 점차 각광을 받고 있다.

한편 아직도 옛정이 돈독하고 인심이 후한 곳에서는 설날이면 마을 사람들끼리 돌림음식을 나눈다. 이제 더불어 즐기는 우리민족의 새로운 설맞이는 가족의 의미를 넘어 협동과 조화를 이루는 민족공동체적인 의미로 승화되면서 오히려 외롭고 조용한 설이 흥성하고 따뜻하며 즐거운 설로 전환하는 좋은 계기를 맞고 있다.

민족전통과 타민족의 풍속이 공존하는 설

문화적인 면에서 우리 민족 설맞이를 고찰해 볼 때 아직도 우리 민족에게는 설에 민족의 전통음식을 해먹는 습관이 남아있다. 이를테면 찰떡, 설기떡, 송편, 순대, 묵 등…그리고 설날 아침 조상에게 차례상을 차려드리고 세배도 하고 특히 부모님 댁에 설을 보내러 온 젊은이들이 설날 아침 동네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는 미풍양속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상지시 신흥촌에서는 귀향한 젊은이들이 일일이 마을 노인들을 찾아다니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초하룻날 아침 노인협회에 모여 단체로 세배를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배법은 사람이 곁에 있어서만 아니고 집을 떠나 멀리 있는 사람들도 마을 어른들에게 설인사를 올리는 새로운 미덕이 되고 있는데 월성촌 출신 기업인 김용화씨는 마을에 남은 분들에게 설 세배를 드리는 마음으로 설날 각 가정에 귤 한 상자씩을 선물했다고 한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정초부터 훈훈한 소식이다.

민족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아 중국 조선족은 우리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한민족의 설 문화를 하나하나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를테면 섣달 그믐밤 자정에 물만두를 삶아 먹고 생활에 여유가 있으라는 의미로 설에 생생한 물고기만은 꼭 먹는 습관 말고도 최근에 설을 맞으면서 요란스럽게 폭죽을 터트리고 출입문에 주련을 붙이는 가정이 늘고 있다.

이것 역시 앞으로 중국 조선족의 하나의 설맞이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이제 우리 민족의 설맞이는 우리의 전통과 타민족의 풍속이 공존하는 설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