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 / 연합뉴스 실장]

논객들의 세상이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이후 안보 위기감과 남북 긴장이 고조되자 한 말발 먹힌다는 분들이 모두 나서 저마다 문제 해결의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다. 북한의 핵 포기를 위한 대화와 타협론에서 핵무장이나 김정은 제거론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가히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예나 지금이나 논객들의 말이 무성하고 종잡을 수 없는 시대는 평온하지 않다. 이성과 상식이 외면받고 앞뒤 재지 않는 저돌적인 의견과 기책이 난무하는 시대를 우리는 난세라고 한다. 어지러운 세상은 위기가 일상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2500년 전 중국이 그랬다. 주나라가 권위를 잃고 각 지역에서 제후나 힘 있는 건달들이 저마다 나라를 세워 영토 넓히기 싸움에 돌입했다. 수많은 세력이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7개의 강국(전국 7웅)으로 통합되고, 다시 진나라가 통일시대를 열기까지 약 550년간 중국은 엄청난 혼란을 겪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대의 논객은 물론 기술자나 사기꾼까지 중원을 떠돌며 지닌 생각이나 책략을 팔아먹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간혹 실력이 검증된 자는 책사로 대접 받았으나 뜻을 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됨(仁)의 사상을 설파하며 30년간 72명의 제후를 만났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불우하게 삶을 마친 공자(孔子)도 그중 한 명이었다.

대한민국이 지금 난국에 처했다고 한다. 북한의 파라오인 김정은의 핵 도발로 안보위기론이 불거졌다. 그동안 설마설마하다가 거듭된 실험을 통해 핵과 운반수단을 고도화하자 김정은이 남쪽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압도된 모습이다. 경제는 안팎 악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조업이 무너지고 저성장의 긴 터널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청년실업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바라보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지만 희망이 없다는 비관론이 팽배해 있다.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시기에 사람들이 불행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의 표현이다.

이를 어느 학자는 아포리아(Aporia) 상태' 라고 표현했다. 그리스어로 아포리아는 길이 끊겨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길이 막혔으면 뚫어야 한다. 난국을 희망으로 바꿀 리더십이 절실하다. 하지만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해결사가 필요하다. 고만고만한 책사가 아닌 큰 전략가가 나와야 한다. 수준 높은 책사는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뜻을 받아주는 통치자에게 의탁해 시대를 선도한다. 사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결단력, 절제력을 갖춰야 한다. 'NO'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안팎으로 굴곡 많았던 우리 역사에서 수많은 책사가 명멸했다. 외세의 침략으로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인도 있었고, 내부 모순에서 비롯된 난국을 수습한 경세가도 있었다. 상황을 오판해 국가를 혼란으로 몰아넣거나 권력에 붙어 영달을 꾀했던 간신배도 있었다.

위기 국면에서 나라를 이끌었던 역사상의 전략가로 수나라 100만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을지문덕, 백제ㆍ고구려의 협공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대당 외교로 삼국통일의 길을 연 김춘추, 원명 교체기에 조선왕조를 설계한 정도전이 돋보인다. 이순신을 발탁해 7년 왜란에서 강토를 지켜낸 유성룡, 역적 소리를 들으면서도 호란의 말발굽에서 나라의 목숨줄을 붙잡은 최명길도 평가받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무모한 명분론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국가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활로를 찾았다. 결단의 고비마다 뒷다리를 잡는 정적들과 대책 없는 통치자를 끈질기게 설득해내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하지만 대통령 5년 임기제가 정착하면서 인물을 키우지 못했다. 단임 대통령들은 임기 내 성과나 인기에 급급해 사람을 너무 자주 교체하는 바람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없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연과 학연에 코드인사, 보은인사가 반복되면서 능력 있고 소신 있는 전략가들의 설 땅이 없어졌다. 해당 분야 외엔 아는 게 없는 전문가 만능주의에 빠져 정책의 시야를 극도로 좁혀놨다. 실패한 인사의 반복이었다.

국정이 고차방정식이 된 상황에서 만기친람의 리더십으로는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대북정책, 외교와 안보, 경제 같은 분야에서 성과를 내려면 제대로 된 책사에게 맡겨 주요 정책의 틀을 짜고 정권과 관계없이 일관되게 실천해야 한다. 좁은 국토, 한정된 인적 자원에서 사적 호불호(好不好)로 사람을 가리는 인사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현재 처한 국면을 타개하려면 통상 수준의 인재로는 안된다. 받아 적고, 지시한 일만 할 줄 아는 아마추어 관료로는 새로운 국가를 개척할 수 없다. 확고한 국정의 비전을 갖춘 혁신적이며, 헌신적인 책사가 필요하다. 폭풍우 속에서 별자리를 짚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19세기 독일 통일의 주역인 비스마르크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당시 독일 연방은 독립된 38개 군주국으로 지리멸렬 상태였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이 게르만의 통합을 원치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 연방의 중심국인 프로이센의 재상에 취임한 비스마르크는 현란한 외교술로 영국과 러시아를 묶어놓은 뒤 오스트리아의 무릎을 꿇리고 1871년 프랑스를 침공해 항복시킴으로써 독일 통일을 완수했다.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처참하게 무너진 이후 65년의 절치부심 끝에 이룬 설욕이었다.

빌헬름 1세에 의해 47세에 수상에 발탁된 비스마르크는 국가의 당면 현안은 다수결이나 여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무력)과 피(전쟁)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전략적 혜안과 역사적 안목으로 무장한 비스마르크는 승리에 도취해 폭주하지 않았다. 영국 등 강대국을 자극하지 않는 냉철함으로 유럽에서 영토확장으로 나아가지 않고 현상유지를 택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유럽 제일의 부국강병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의회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킨 군국주의와 나치즘의 씨를 뿌린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독일의 통일은 꿈으로 남겨졌을지 모른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대명천지에서 왕정 시대의 비스마르크 같은 독재적인 재상을 불러오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정치를 '과학이 아니라 가능성의 예술'로 봤다. 그의 현실주의에 기초한 정치ㆍ외교적 상상력과 과업을 향한 집념이 부럽다. 또 그를 발탁해 30년 가까이 국정을 믿고 맡긴 통치자의 포용력에 끌린다. 역사상 위대한 통치자들의 곁에는 늘 위대한 참모가 있었다. 현대 정치에서 여론은 중요하지만 결국 국가의 명운을 가를 결정은 소수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다. 인사가 만사인 이유다. 지금 주변 열강은 북한의 핵 문제를 자국의 정치안보에 이용하려고 저마다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저들은 과거 늘 그랬듯 대한민국의 안위보다 자국의 이익에 관심이 있다. 믿을 곳은 우리 스스로밖에 없는데도 내부에서는 친미냐 친중이냐, 아니면 양다리를 걸쳐야 하느냐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구한말'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나라의 사정이 참 한심하다. 이 상황을 깰 방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걸 실천할 전략가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