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 국제부장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 누구나 먼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 최상인가이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머리가 앞설 때가 있고, 가슴이 먼저 움직일 때도 있다. 그런데 세상일이 꼭 제일 좋은 것만 고르게 되지는 않는다. 이럴 때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게 된다.

요즘 미국 대선후보 경선전이 딱 그런 형국이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의 바람이 돌풍으로 번져나가면서 미국 대선정국이 극심한 혼돈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트럼프가 쏟아내는 선동적 발언에 대해 미국 사회 안팎에서 비판이 쇄도하고 있지만, 트럼프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막말 반격을 하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귀족 알렉시 드 토크빌이 부러워했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트럼프의 폭주를 막기 위해 놈 촘스키 교수 등 미국의 진보인사들이 ‘증오를 멈추고 트럼프를 버리자’(Stop Hate Dump Trump)는 캠페인에 나섰고, 전직 외교관과 장성들도 반(反) 트럼프 공개서신을 발표했다. 주목되는 것은 로버트 케이건, 빌 크리스톨 등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쳤던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지식인들이 트럼프 대신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자는 의견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 최선의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차선의 후보마저 찾을 수 없다면,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 차악의 선택을 하자는 논리다. 여기엔 공화당의 극우 선동꾼을 대통령으로 만드느니,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줘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만은 막자는 절박함이 배어 있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케이건은 “공화당을 구할 수 없다면 나라라도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클린턴에게 표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네오콘 성향의 주간지인 위클리 스탠더드 편집장인 크리스톨도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그는 1990년대 민주당 소속 빌 클린턴 대통령이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인도적 개입을 결정했을 때 지지를 선언해 공화당의 반발을 산 적이 있다. 그런 그가 트럼프 광풍 앞에서 차라리 클린턴에게 표를 몰아주자고 나선 것은 당의 이해관계보다 미국의 미래가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히 네오콘 애국주의라 할 만하다.

트럼프 돌풍이 얼마나 지속될지 예단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미국의 진보진영은 물론 보수진영까지 나서서 트럼프의 선동정치를 비판하고 있는 만큼 대선 본 게임이 시작되면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무엇이 덜 나쁜 방안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될 것이다. 국가적 위기 국면에 네오콘의 애국주의가 발동되는 것은 1830년대 토크빌이 봤던 미국 민주주의의 저력이 그래도 살아 있다는 증거다. 4월 총선을 앞둔 여의도 정국은 트럼프의 막말 정치가 횡행하는 미국만큼이나 혼미하다. 여야 정당이 벌이는 공천 갈등은 정치인들의 의식이 여전히 ‘당익(黨益)은 국익에 앞선다’는 조선 후기 송시열류의 붕당정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당파적 이익보다 국익을 중시하는 세력이 없다는 건 국가적 불행이다. 그래서 네오콘의 애국주의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