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옥/기후변화행동연구소·시민환경연구소 소장

담백했다. 아프지만 불편한 것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아슬아슬한 감정선은 흑백영화가 주는 차분함과 섞여 마음속 화를 다독여주었다. 사실 영화 <동주>를 보러가는 발걸음이 그다지 가볍지는 않았다. 스물여덟의 빛나는 청춘이 마주해야 했던 일제강점기의 칠흑 같은 어둠,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써내려갔을 시들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영화가 종반부를 향해 달릴 때까지만 해도 ‘결국 강요된 눈물과 계몽으로 끝나겠지’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그것이 기우였음을 깨달은 것은 영화가 끝나고 조명이 켜졌을 때였다. 눈물이 맺힌 것은 맞는데 그건 분명히 슬픔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배우 강하늘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살아나는 시들의 느낌은 뭐랄까,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에 퍼지는 먹먹한 뭉클함 같은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화상’이었을 윤동주와 송몽규. 엔딩 크레디트는 두 사람의 실제 사진과 함께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한 연대기로 특별함을 더한다. 같은 해 같은 곳에서 태어나 같은 곳에서 공부하고 같은 죄목으로 수감된 벗에게 느끼는 동주의 열등감은, 자칫 무미건조할 수도 있었던 영화의 서사에 따뜻한 체온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문득 윤동주 시인의 시를 꿰뚫고 있는 ‘부끄러움’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졌다. 윤동주의 시에서 부끄러움이 고개를 내미는 것은 ‘서시’만이 아니다. ‘별 헤는 밤’에서 시인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의 모습에서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쉽게 쓰여진 시’에서도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윤동주에게 부끄러움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은 왜인가.

철학자 이선은 2009년에 발표한 논문 ‘부끄러움의 도덕적 기능’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끄러움은 생리적인 감정인 동시에 문화적 산물이다. 하지만 부끄러움에 내재된 구조를 들여다보면 법테두리 바깥을 지배하는 사회적 규범 또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나의 존재성을 발견하는 체험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공동체 윤리에 의해 형성된 인격의 일부이자 동시에 타자를 향한 열림의 자유로움을 성취하는 계기이다.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감 능력 결여, 낮은 행동 통제력, 극단적인 자기중심성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현실에서 자신의 모습이 자신이 원하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현재 모습을 모르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그렇다면 대통령에게 미운털이 박힌 자들을 찍어낼 것을 주문 받고 얼마 전까지 칼을 마구 휘둘러대던 그 청부업자는 어땠을까. 대통령이 대구에 줄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고 있다며, “대통령의 개혁에 딴지를 거는 세력은 북한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당에도 있었다”고 선동하는 ‘진박감별사’에게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불행한 일이지만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둘 다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TV 화면 속에서 뚝뚝 묻어나는 그들의 오만한 얼굴을 보면 그렇다.

이선의 논문에는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나오는 얘기도 소개돼 있다. “정의와 부끄러움을 몇몇 사람에게만 나누어준다면 국가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부끄러움을 지닐 능력이 없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법률을 만들어 국가의 화근처럼 처단해버려라.” 4월13일 총선. 이번만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능력’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