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정 / 아시아세미나하우스 이사장 

NHK는 1963년부터 매년 한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적 주제를 다룬 대하드라마를 방영해오고 있다. 2015년에는 야마구치현 하기(萩)시가 무대가 된 “하나모유(花燃ゆ・꽃은 타오르고)”가 방영되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하기시는 한반도 쪽의 해안 지역인 상인(山陰) 지방 남쪽에 위치한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한적한 항구이다. 이런 하기가 드라마의 주 무대가 된 것은 이곳이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시대 이 지역 쵸오슈(長州)의 영주 모오리(毛利)가의 성이 있던 곳이고,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이어지는 반(反) 바쿠후 운동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비록 작은 항구도시이긴 하지만 도쿄, 오사카, 나고야(名古屋)처럼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죠오카마치(城下町)였다.

모오리 집안은 원래 히로시마(広島)성을 근거로, 지금의 추우고쿠(中国) 지방의 대부분인 히로시마, 야마구치(山口),　시마네(島根), 돗토리(鳥取)와 오카야마(岡山)의 일부까지를 지배해 온 대단히 큰 세력이었다. 일본은 1183년(혹은1185년) 가마쿠라(鎌倉) 바쿠후가 성립한 이래 무로마치(室町) 바쿠후, 전국시대,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에 이어 등장하는 도쿠가와 바쿠후에 이르기까지 무사의 지배체제가 계속된다.

이 체제는 최대 세력인 바쿠후가 정상에서 전국을 컨트롤 하지만 각 지방은 그 지역의 영주가 통치를 하는 봉건체제였다. 모오리 가(家)는 커다란 봉건영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도쿠가와 바쿠후가 성립하자 도요토미 가의 편을 들어온 모오리가의 영토를 빼앗고 쵸오슈(지금의 야마구치 현)만을 그 지배하에 두게 했다. 모오리 가의 쵸오슈 한(藩)이 탄생한 것이다. 추우고쿠 지방을 호령하던 모오리는 도쿠가와 바쿠후에 대한 한을 품은 채 쵸오슈 지역에 갇힌 셈이 되었다. 게다가 오오우치(大内) 시대부터 이 지역의 중심지였고 모오리 가의 해상무대였던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에 가까운 야마구치에 성을 만드는 것조차 허용이 안 되고 구석진 하기로 갈 수밖에 없었다. 치욕 속에서 와신상담의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도쿠가와 편(동군)과 도요토미 편(서군)이 '천하'를 걸고 싸워 결과적으로 도쿠가와가 정권을 잡게 되는 세키가하라(関ケ原) 전투가 있고 나서 8년이 지난 1608년의 일이다.

일본의 대하드라마의 무대는 항상 관광객으로 붐빈다. 하기시에도 관광객이 북적거릴 줄 알고 찾았더니 의외로 한산한 편이고 관광버스가 드문드문 오갈 뿐이다. 여기저기 바람에 날리는 '하나모유의 무대'라든가 '메이지 유신의 책원지(策源地)'라 쓰인 깃발이 관광객보다 더 많아 보인다. 역대 NHK 대하드라마 중 시청률이 최저였다는 게 이 드라마의 유일한 화제였던 걸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은 한산함이다.

하나모유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배출시켰다는 요시다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여동생 스기후미(杉文)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후미는 쇼인이 주제하는 사설 교육시설인 쇼카손쥬쿠(松下村塾)에서 그 문하생들을 뒷바라지하며 도쿠가와 바쿠후 말기의 격동기를 맞는다. 미국과 맺은 1858년의 수호통상조약을 불평등조약이라 비판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던 오빠는 처형당하고, 남편이자 오빠가 높이 평가하고 아끼던 제자 쿠사카겐즈이(久坂玄瑞)도 양이운동의 실패로 자살하고 만다. 그 후,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지고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쵸오슈한은 소멸하게 된다. 언니를 따라 군마켄(群馬県)으로 이주한 후미는 언니 사망 후 형부(당시 군마켄 지사)와 재혼하여 이후 여성교육의 보급에 헌신한다.

이 드라마가 인기가 없었던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여성의 체험을 통해서 본 격동의 사회상을 그릴 의도였는지, 근대화 과정에서의 선구자로서의 여성상에 포커스를 맞추려 했었는지가 불분명한 게 결정적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하기성, 부케야시키(武家屋敷), 쇼카손쥬쿠 등을 돌아보았다.

▲하기성 입구에서

성이라고 하지만 정작 성채 그 자체는 없고 축대 위의 빈 터만 보였다. 그다지 넓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성채의 규모도 작았으리라 짐작된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 주변을 파고 물을 채워두는 호리(濠)는 남아있었다. 성이 작은 산을 사이에 두고 바다를 끼고 있어 아름다웠을 것 같다. 성 주변에는 으례히 부케야시키라는 무사들의 주택가가 있기 마련이다.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의 무사란 전투하는 군인이라기보다 사무직 공무원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으므로 부케야시키는 곧 공무원 숙사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기의 부케야시키들이 들어서 있는 동네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계획적으로 정리가 잘 된 아담하고 깔끔한 게 인상적이었다.

골목에 들어서니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기도타카 요시(木戸孝允) 등 한국인의 기억에도 생생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살던 집이며 공부하던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 쇼인진쟈 앞에서

쇼카손쥬쿠는 일본의 역대 수상들이 방문하는 세계유산 시설 치고는 의외로 초라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작고 시골티 나게 만든 세트 같았다. 그에 비해 바로 옆의 쇼인진쟈(神社)는 위용을 뽐내고 있어서 대조적이었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이데올로기(방향)를 제시하였고 그의 가르침을 받든 문하생들이 위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신으로 모시고 추앙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신사의 위용 속에 엿보이는 듯하였다. 그러나, 쇼인상(像)이나 쇼카손쥬쿠의 권위는 메이지 유신을 이룬 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쇼인이 제시했다는 방향이란 존왕양이, 일황만민(一皇万民), 아시아 지배의 정당화로 이어지는 일등국가로서의 자부심 향유 정도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런 '방향'들이 한 국가·사회의 근대적(합리적)　발전의 지침돌이 될 수 있을까, 메이지 유신이란 결국 바쿠후 타도 운동이었고, 그 바탕에는 배타적이고 침략적인 국가주의가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과연 쇼인이 감금 생활을 포함한 2년 반만에 시대를 뒤엎는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의아심을 품은 채 하기를 뒤로 하고 야마구치시로 향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