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7월 18일 일본 도쿄(東京) 신주쿠(新宿)에서 재일 한국·조선인을 대상으로 진행된 혐한 시위(오른쪽)와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왼쪽)의 모습. ⓒ연합뉴스

“실효성 있는 혐한시위 규제 법을 만들어라.”

일본의 여당인 자민·공명당이 최근 ‘혐한(嫌韓)’ 시위를 포함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 규제 법안을 마련,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법안에는 헤이트 스피치 발생 시의 처벌 규정은 물론 헤이트 스피치가 위법이라는 명확한 규정 조차 없어 ‘반쪽 법안’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혐한 시위의 주된 피해자인 재일동포 사회는 물론 법조계까지 반발하고 있다.

재일동포 사회 강력 반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은 지난 13일 도쿄(東京) 중앙회관에서 열린 지방 단장 및 중앙 산하단체장 회의에서 “이번 법안에 대해 매우 깊은 실망감을 금할 길이 없다.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고 14일 밝혔다.

민단은 자민·공명당의 법안에 대해 “처벌규정을 마련하지 않은 이른바 ‘이념법’이라고 치더라도 헤이트스피치가 위법이라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고 이 법안의 맹점을 지적했다.

민단은 이어 “법안 전문(前文)이 ‘부당한 차별적 언동은 용납하지 않음을 선언한다’고 하면서도 ‘부당한 차별적 언동이 없는 사회 실현에 기여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단순한 노력 의무를 명기하는데 그쳤다”고 비판했다.

민단은 또 헤이트스피치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인터넷상에서의 대책에 대해 언급돼 있지 않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민단은 “이번에 국회에 제출된 법안 내용으로 헤이트 스피치의 폭력에 얼마나 대응할 수 있을지, 어떤 실효성을 얻을 수 있을지 매우 의문”이라고 반발했다.

민단은 “(헤이트스피치) 금지 조항을 명기함으로써 실효성 있는 헤이트스피치 근절을 위한 법안을 만들기를 강하게 바란다”고 요구했다.

법조계에서도 이번 법안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다.

재일동포 변호사들이 참가하고 있는 재일코리안변호사회는 14일 “이번 법안을 수정해 보다 실효성이 있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반쪽’에 그친 헤이트 스피치 규제법안

일본 연립여당은 지난 8일 ‘본국(일본)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향한 대응 추진에 관한 법률안’이라는 이름의 헤이트 스피치 억제 법안을 참의원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일본 이외 국가·지역 출신자나 그 자손을 배척하는 행위를 부추기는 차별적 언동을 없애는 것을 지향한다는 내용과 정부가 상담·교육·계몽활동 등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거리에서의 헤이트 스피치나 혐한 시위 등 불특정 다수에게 차별적 언동을 하는 것도 금지 대상으로 정했다.

자민당은 그러나 헤이트 스피치 발생 시의 벌칙 조항은 물론 헤이트 스피치가 위법이라는 규정 조차 담지 않아 헤이트 스피치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가와 지자체 등이 대책을 마련하라는 취지의 ‘이념법(理念法)’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자민당의 이런 법안 내용은 옛 민주당(현 민진당) 등이 지난해 5월 제출한 법안이 인종 등을 이유로 한 모욕, 짓궂은 행위, 차별 대우 등을 폭넓게 금지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일상화되고 있는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일본에서는 지난 3년 반 동안 사실상 헤이트 스피치에 해당하는 시위가 1000건 이상 발생했다. 일본 법무성이 조사·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4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헤이트 스피치’ 시위를 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단체들의 시위·가두선전 활동이 1152 차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시위 중 40％ 이상은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서 발생했다.

실제 시위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 72건(약 98시간 분량)을 대상으로 실시한 분석에서는 ‘일본에서 나가라’, ‘죽여버려’, ‘조선인은 바퀴벌레다’ 등 차별·협박성 발언이 무려 1803건이나 확인됐다. 이는 헤이트 스피치가 주로 재일 한국인·조선인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향신문=윤희일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