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필/논설고문

친구 중 부잣집 출신이 하나 있었다. 서울로 유학 와서는 부모가 사준 집에서 가정부와 함께 살았다.

방이 3~4개나 되는 한옥은 언덕 중턱에 고즈넉이 자리잡아 운치가 빼어났다. 가끔 놀라가서는 실컷 먹고 영양보충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반면 한 친구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부모가 논도 팔고 밭도 처분해 학자금을 댔지만 턱도 없이 부족할 뿐. 무엇보다 몸 하나 의탁할 곳이 없었다. 부잣집 아들도 친구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자장면을 사주는 등 딴에는 애를 썼다. 부잣집 도련님답지 않게 친구를 위한 마음 씀씀이가 살뜰했다.

그의 배려는 꼭 거기까지. 방도 여러 개 있는데 갈곳 없는 친구를 위해 하나 내주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련만. 그때 느낀 게 있었다. '부자는 결코 가난한 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걸.

몇해 전 친구 셋을 서울의 고급 한정식 식당에서 만나 모처럼 회포를 풀었다. 삶이 어려웠던 친구도 고위직 공무원을 지내 이젠 그가 계산을 하겠지 했는데 천만에. 이번에도 역시 '원조 부자'가 당연하다는 듯 종업원에 크레딧 카드를 건넸다. 달러로 환산해 보니 400달러는 족히 넘었을 텐데 주저함이 없었다.

언젠가 가난했던 친구가 속내를 털어놨다. "어쩌면 그 (부자) 친구가 내 삶의 롤모델이었는지 몰라. 내게 자극이 되었거든. 그래서 (성공하려고) 열심히 살았지." 또 하나 깨달은 게 있었다. 부자가 많아야 살기 좋은 사회가 된다는 사실을.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돈 많은 사람이 정치를 하면 어떨까. 플러스일까 아니면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올까. '플루토크래트(plutocrat)'란 말이 있는 걸 보면 긍정적이지 않나 싶다. 옛 그리스말로 '부자 정치인'이란 뜻이다.

역사를 봐도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나 공화정 시절의 로마엔 정치에 입문하는 수퍼 리치들이 많았다. 돈 걱정 없으니 부패할 리 없었고 오직 나라살림에만 관심을 쏟았을 터.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플루토크래트'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

대한민국도 한때는 '플루토크래트'의 위세가 자못 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후보시절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지 않은가.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 찜찜한 구석(BBK 스캔들)이 적지 않았으나 대기업 CEO 출신이 대권을 잡으면 경제가 한결 좋아질 것으로 기대해 청년들조차 몰표를 던졌다. 그때만 해도 이 전 대통령은 젊은이들의 롤모델로 손색이 없었다.

미국의 공화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 역시 '플루토크래트'다. 플로리다의 리조트 몇개 팔면 선거자금을 충당하고도 남을 만큼 '실탄'이 넉넉하다. 당선되면 공직 경험 없이 백악관으로 직행하는 사상 첫 대통령이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모른다는 데 '흙수저' 블루칼라는 왜 '금수저' 트럼프에 열광하는 걸까. 트럼프는 백인 노동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꾀를 냈다. '플루토-포퓰리즘(pluto-populism)'이란 것이다. '억만장자의 대중을 상대로 한 인기영합주의'다. 자신의 말만 들으면 부자가 된다는데 어느 누가 마다 하겠는가.

21세기에 쇄국정책을 펼 작정인지 멕시코 국경에 담장(반이민)을,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 관세장벽(보호무역)을 쌓으면 잘 살 수 있다고 노동자들을 꼬드겼다.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연일 선동공세를 펴고 있는 트럼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안 되든 그의 존재 자체는 이미 미국 뿐 아니라 지구촌에 충분히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