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익 / 논설위원

어제 본지 사회면에 러시아 사는 세 살짜리 한국계 어린이가 김현웅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대한민국 국적(國籍) 증서를 받는 사진이 실렸다. 상대의 키 높이에 맞추느라 한껏 허리 굽힌 장관으로부터 증서를 받는 어린이 모습이 의젓했다. 이름은 정 비탈리. 한말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외현손(外玄孫)이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왕산은 전국 13도 의병을 연합해 서울 탈환을 꾀했다. 동대문 밖을 집결 장소로 했지만 일제의 봉쇄로 의병부대가 약속대로 모일 수 없었다. 왕산은 결사대 300명을 이끌고 항전하고 2차 작전을 계획하며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붙잡혔다. 그는 서대문형무소 '사형수 1호'가 됐다. 정부는 1962년 왕산에게 독립유공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동대문~청량리 길을 '왕산로'라고 부르는 데는 이런 내력이 있다.

▶왕산 집안만큼 일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예도 드물다. 경북 선산의 유학자이자 지주 집안 종손인 왕산의 큰형은 3000마지기의 땅을 군자금으로 댔다. 다른 형제들은 왕산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거나 을사오적 처단에 가담했다. 왕산이 순국한 후 집안은 일제의 감시와 핍박을 피해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해 무장 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만주 동북항일연군 참모장이었던 허형식은 왕산의 조카다. 조카 허길은 퇴계의 진성 이씨 집안에 시집가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해 아들들을 독립지사로 길러냈다. 조카의 딸 허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손자며느리가 됐다.

▶왕산의 친손자인 허진은 독립군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 벌판을 누비다 광복 후 북한으로 갔다. 황장엽·연형묵 등과 함께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모스크바에 유학 간 그는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보고 김일성 비판 운동을 시작했다. 북한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자 반(反)김일성 운동이었다. 1957년 북한 대사관에 잡힌 그가 2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탈출한 사건은 유명하다. 그는 1997년 작고할 때까지 러시아 고려인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북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왕산의 후손들은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번에 대한민국 국적을 받은 독립유공자 후손 가운데는 헤이그 밀사였던 이위종, 상해 임정 재무총장을 지낸 최재형 선생 후손도 들어 있다. 국적 부여는 대단한 선물은 아니다. 어려운 시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분의 후손들이 겪은 세월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