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채 / 논설위원

도쿄특파원 임기를 마친 게 2008년이니 벌써 8년이 지났다. 느닷없이 세월 타령을 하는 것은 한·일관계가 갈수록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흘러간 레퍼토리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양국관계의 만개 시점은 2002년이었다. 그해 여름 월드컵이 열렸다. 도쿄 한복판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얼싸안고 ‘동반 16강행’을 외치던 모습이 생생하다. 때마침 드라마 <겨울연가> 등 한류도 일본에 몰아쳤다. 한국에서는 ‘왜색’ 문화가 ‘일본’ 문화로 격상됐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셔틀외교도 시작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고이즈미 총리의 잇단 야스쿠니신사 참배, 교과서, 독도 문제 등이 겹치면서 양국관계는 단절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광복절 축사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딱 한마디였다. 지난해 말 느닷없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상황에서 후속 발언에 귀기울였던 게 무색할 지경이다. 과거 한·일관계 악화는 열에 아홉은 일본이 자초했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정치인 망언에 과거사 왜곡이 한국인의 심사를 뒤틀었다. 일본을 두들겨 패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시키는 것 한편으로 정치적으로도 수지맞는 장사였다. 열린 마음, 열린 민족주의를 얘기하다가도 시민들의 감성을 건드려 지지율 반전을 꾀한 것은 흔한 수법이었다.

문제는 상황과 여건이 달라졌는데도 한국의 대일 접근이 여전히 구시대적이라는 데 있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 과거사 진전을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아베 총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호기를 능가했다. 그사이 일본은 안보동맹 강화를 필요로 하는 미국을 앞세워 한국에 위안부 문제 흥정을 시도했고, 결국 이는 먹혀들었다. 글로벌 포위망을 통해 해결을 시도했던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 되치기당한 꼴이 됐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어제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 등의 독도 방문은 자살골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독도에 대한 자긍심을 키웠다며 만족해할지 모르겠지만 외교적 실리는 없다. 되레 독도가 분쟁지역임을 만방에 알리고 싶어 하는 일본에 큰 선물만 안겨줬다. 일본으로부터 무릎꿇고 사과를 받아내도 시원찮을 광복절에 일본의 항의를 받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그들은 먼저 일본 의원들을 만나 독도 영유권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세계를 향해 독도는 한국 땅임을 알리려는 노력부터 해야 했다. 4년 전 이명박 대통령의 느닷없는 독도 방문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알 수 없다.

이제 되묻자. 우리는 일본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 걸까.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예를 들자. 며칠 전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 퇴위 계획을 밝혔다. 이곳저곳에서 아베 총리의 우경화에 대한 견제라는 해석이 나왔다. 정말 그럴까. 일본 헌법은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왕은 헌법이 정한 국사행위 말고는 국정에 관여할 수도 없다. 아키히토 일왕이 일본의 침략지를 찾아다니며 참회하고, 평화헌법 수호에 강한 목소리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헌법 테두리 안에서의 역할이다. 그 스스로 현실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는 삼간다. 희망사항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한 가지 더 되묻자. 우리는 일본의 과거 잘못을 들어 막 대하지 않았을까. 주변에 일본과의 관계 증진에 힘빠져 하는 이가 많다.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에 대한 염증이 컸을 것이다. 그나마 끈이었던 경제분야 협력 역시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엷어졌다. 이 때문에 일본을 대신해 유럽과 가까워지는 게 다양성을 위해서 나은 선택이라는 인식도 있다. 옳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웃은 싫어도 떨어져 지낼 수 없다는 점이다.

되돌아보자. 한·일관계에서 미래가능성을 확인한 것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 간의 공동선언이다. 두 정상은 21세기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를 위해 김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의 역사인식과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한 일본의 역할을 평가했다. 일본의 겸허한 반성을 받아들이고 교류도 확대했다. 그런 게 쌓여 몇년 뒤 한류가 됐다. 물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철학과 사명감, 이를 가능케 하는 추진력 등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광복 71년. 여전히 반성 않는 일본을 흠씬 두들기고 싶은 마음에 불끈한다. 하지만 참자. 과격한 의견을 말하는 것은 쉽다. 역사를 공부할 필요도 없다. 경직된 시선으로는 우리의 이익을 만들 수 없다. 일본을 알자고 하는 것은 일본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