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 / 서울대 교수·사회학

고독한 의려(義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 남방의 항구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해는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는 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저렇게 그윽하게 육지를 쓰다듬는 동해를 처음 보았다. 날씨는 무더웠다. 이글거리는 태양빛에 더욱 반짝이는 동해와 육지가 만나는 곳에 발해 염주성터가 놓여 있다. 발해 사람들은 염주성에서 배를 띄워 일본과 교역했다. 일본 열도 서안에서 발견되는 대(大)씨 왕국(발해)의 흔적은 더러 신사 수호신이 되었다. 정착보다 개척을 좋아한 발해인은 지평선을 질주하고 수평선을 넘나들던 기마민족의 선발대였다.

2016 평화 오디세이가 여정을 연해주로 잡은 이유는 명백했다. 지난해 압록강과 두만강변 만리 길을 행군하면서 실감했던 역사적 불화와 정서적 단절감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것이란 막연한 예감, 연해주 독립투사와 고려인이 겪은 고난의 흔적에서 남북 합주를 향한 실낱같은 단서를 발견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 예감과 기대는 대체로 들어맞았다. 인간의 상상력 공간은 한없이 넓고 무궁무진해 땡볕 아래 서 있어도 그곳은 단군이 강림한 신시(神市)가 되고, 고구려 유민을 거느린 대조영이 만주 정벌을 호령한 도읍이 되고, 독립의려(義旅)가 잠시 몸을 쉰 야영지가 된다.

크라스키노 전망대 우측엔 연해주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의 연추(煉秋) 마을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정면에는 안중근 의사가 독립의려를 이끌고 일본군을 향해 진격하던 산길이 정상으로 이어진다. 산맥 너머엔 두만강변 북한 도시 경흥과 회령이 있을 것이다. 왼쪽에는 발해 옛 성터, 전망대 바로 아래는 러시아 국경수비대가 거주하는 촌락이다. 약 100호가 살고 있는 그 촌락엔 인적이 드물었고,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본 제국,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발해 제국의 옛이야기가 한데 얽힌 벌판에 서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초원지대를 헤맸던 조선인들의 지친 모습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독립의군의 진군가가 선명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바로 이 정서가 남북이 새로 시작해야 할 출발점이다. 70년간 증오의 세월을 보냈던 남북 간에 이런 교감의 공유지가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데올로기는 시간 속에 풍화하고, 정서는 세월 속에 번성한다. 개성공단 폐쇄를 감행하면서까지 북한과의 교섭을 중단한 남한, 미사일과 핵탄두에 존재감을 과시하는 북한은 100년 전 세기가 바뀌던 무렵 여기 연해주에서 오직 하나의 목표를 꿈꾸던 한 몸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됐다 간도로 돌아온 이상설은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열었다. 일제에 감금된 고종에게 밀지를 받들지 못했다는 사죄의 표현이었다. 1860년대부터 시작된 간도 이주민은 1910년대에 이르러 20만을 헤아렸다. 1909년 일제가 청(淸)과 ‘간도협약’을 맺고 한인 소개 작전에 돌입했다. 비어 있는 땅, 연해주로의 이주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연해주는 제정러시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비교적 자유로운 땅이었다. 한인들은 만주와 러시아 접경지대를 따라 넓게 퍼져 나갔다. 북쪽으로는 바이칼호 부근의 치타, 만주 중부 하바롭스크와 하얼빈, 동부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선이었다.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이상설은 국민회와 권업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선도하는 한편 각지에 흩어진 의병을 모아 ‘13도의군’을 창설했다. 안창호가 멀리 미국에서 잠입해 신민회 후속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연해주 광복회와 상하이(上海)의 결속을 다질 때였다. 블라디보스토크항 언덕에 독립 결의를 다지던 신한촌이 형성됐다.

크라스키노에서 단지동맹을 맺은 안중근 의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단재 신채호가 『동사강목』을 품에 안고 북간도로 간 건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처형된 그해였다. 신채호는 북간도에서 지안(集安)을 거쳐 랴오둥(遼東)반도, 단둥(丹東), 베이징(北京)까지 조선의 발원 유적을 찾아 헤맸다. 『조선상고사』 서문에 나오는 그 유명한 구절은 신화로 둔갑한 일제의 역사 왜곡에 비수를 꽂으려는 ‘사(士)’ 정신의 결집이었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현실국가는 붕괴했어도 정신국가, 즉 심적 활동의 기록으로서 역사는 지속된다는 뜻이다. 간도와 연해주 벌판에는 ‘정신국가’를 붙잡고 육신을 불사르던 선조들의 절규가 지층처럼 덮여 있다.

북행하던 신채호를 평양 오산학교에서 배웅했던 청년 이광수가 상하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를 탔다. ‘신한민보’ 주필을 맡아 달라는 도산 안창호의 청을 받들기 위한 여행이었다. 이광수는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이동녕·이동휘를 만났다. 이어 우스리스크에서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의 집에 머물며 독립운동의 눈물겨운 현장을 목격했다. 당시 바이칼호 인근 치타에는 이갑 선생이 체류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대한제국 군대 참령을 지낸 투사였다. 그는 일찍이 계몽단체인 ‘서우학회’를 조직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은 조선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중함을 역설했다. “정치가의 의론(議論)과 기업가의 업예(業藝)가 학문에서 나오는 고로, 사(士)는 정(政)과 상(商)의 모(母)다.” 치타에서 창춘(長春)을 거쳐 남하하는 기차에서 이광수는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구상했고, 4년 뒤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은 아 2000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2·8 독립선언서’를 썼다.

연해주는 북간도의 확장이었고, 북간도는 한반도의 주름진 산맥이 피곤한 몸을 푼 안식처였다. 의병이 일제와 격전을 벌인 만주 국경선을 에워쌌듯 우리의 우국지사와 궁핍한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창춘, 선양(瀋陽), 베이징을 잇는 넓은 정신적 포위망을 구축했고 남쪽으로는 상하이, 시모노세키, 부산을 거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는 영토경계선을 둘러쳤다. 한반도의 울혈과 민족 정서는 한민족의 유랑을 따라 확산됐다. 연해주의 드넓은 초원에선 100년 뒤인 오늘 비좁은 한반도를 가르고 있는 이념의 단절선, 정서의 단층선은 아예 상상 밖의 일이었다. 이광수의 『무정』이 출간된 이듬해 서거한 이상설 선생의 유골은 우스리스크 수이푼강(江)에 뿌려졌다. 수이푼강은 선생의 고향인 충북 진천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과 꼭 닮았는데, 정지용이 주옥 같은 시 ‘향수’에서 그리던 그 강, 금강(錦江)이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던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연해주를 누빈 고독한 의려를 고향 마을 휘돌아 도는 강변에서 마감하고 싶었던 거다.

역사적 자산의 현재화

평화 오디세이 3일째인 지난달 10일,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학에서 개최된 세미나에서 참가자들은 나름 독자적이고 신선한 한·러 경협의 청사진을 쏟아냈다. 중국과 일본이 연해주에 들이는 공에 비해 한국은 뒷짐 지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속초와 여객선을 운항하던 연해주 항구 자루비노항은 텅 비었다. 광활한 초원지대엔 관목과 잡초가 자랐고 농경의 흔적은 없었다. 산골짜기마다 논밭을 개간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민족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치였다. 나진·선봉 경제자유구역의 입직항인 하산항은 통제됐다. 자루비노항의 삭막함을 등지고 점심차 들른 작은 휴식처에서 우연히 고교 동창과 조우했다. 낯설었던 얼굴이 40년 전 기억 속에 떠오르자 세월의 간격은 곧 소멸됐다. 그는 한국의 어느 기업이 조성한 농장의 경영책임자였다. 옥수수와 귀리를 주로 재배한다고 했고, 개장한 지 10년이 넘은 요즘에야 겨우 채산성을 맞추게 되었다고 털어놨다. 우스리스크 부근 현대중공업이 경영하는 농장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냥 씨앗을 뿌리면 무성해질 것 같은 비옥한 초원지대임에도 경협과 자본 투자는 쉽사리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숨은 사연을 입증해 주는 듯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개념과 뉘앙스가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쉽게 추진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만했다. 상생을 위한 이윤 창출이 어디 쉬운 일인가? 세미나에 나온 러시아 전문가는 머뭇거리는 한국의 태도에 냉소를 퍼부었다. 말만 해서 뭐하겠는가, 이런 투였다. 2013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각에 극동개발부를 설치하고, 태평양 연안 개발에 적극 나선 데 대해 한국의 응답은 없었다. 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전문가들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말잔치에 그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연해주에 ‘제2개성공단’을 건설하자는 제안, 산둥(山東)과 인천을 연결하는 페리호, 속초와 자루비노항을 잇고 다시 9288㎞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로 유럽까지 가는 신실크로드, 북극항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원대한 포부의 바탕에는 100여 년 전 연해주에 묻힌 한민족의 애달픈 유랑과 독립 조국을 향한 행군의 궤적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서

크라스키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길은 버스로 3시간 남짓, 해가 서쪽으로 좀 기운 시간이었다. 동승한 참가자들은 나름의 전략적 상념에 잠겼다. 필자는 엉뚱하게 ‘아버지’를 생각했다. 신채호가 정신국가를 상상했듯 한반도 20세기 역사를 끌어온 ‘정신적 아버지’는 어디 있는가? 버스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작가가 동승했다. 황석영과 이문열. 지금으로부터 30년이 지난 뒷날 기억해 보면 역사에 기록될 순간이었다. 1930년대 사회적 리얼리즘의 현대적 연결고리를 만들어낸 황석영과, 거칠었던 시대의 존재론적 의미로부터 가족사와 인간사의 넝쿨을 파고든 이문열 작가. 진보와 보수를 대변하는 두 작가는 ‘정신적 아버지의 결핍’이라는 점에서 통한다. 『객지』와 『삼포 가는 길』로 시대정신을 형상화한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하고 유럽과 미국을 방랑했던 것은 신자유주의의 험난한 파고에 휩쓸린 민중의 삶을 감당해줄 정신적 상징을 찾기 위함이었을 거다. 그날 낮 잠깐의 환담에서 “그런 상징을 찾아냈느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그의 답은 ‘철도 3대’였다. 창춘 남만철도 노동자 조부, 영등포 차량기지 철도원 아버지, 그리고 한국철도공사 직원 아들, 이 3대의 얘기를 마지막 작품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근력이 따라줄까?” 담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문열 작가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북한 원산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했다. 압록강변에서 만난 이복 여동생이 전해온 아버지 소식에 넋 놓고 울었지만 ‘정신적 아버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버지 결핍증은 박경리 선생에게 『토지』를 잉태한 원천이 됐다. 백두대간과 협곡 촌락들에 숨겨진 얘기들을 모신(母神)의 시선에 적셔 끌어올린 대하드라마 덕분에 『고요한 돈강』의 작가 숄로호프나 『티보가의 사람들』을 쓴 로제 마르탱뒤가르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아버지 결핍증을 앓고 있는 두 대가(大家) 덕분에 20년 혹은 30년 뒤 연해주와 만주와 북한과 제주도를 얼싸안는 정서의 공유지가 현실적 생활공동체로 변신했을 수도 있다. 상상력의 힘찬 공간이 영토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릴 것이란 흐릿한 생각은 버스가 어둠이 내린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들어서자 점멸하는 불빛처럼 또렷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