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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交流 한마당」을 이끄는 權鎔大 理事, 그는 누구인가
이구홍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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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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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9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권용대(權鎔大) 理事와 마주했다.
필자가 權鎔大 씨와 처음 만난 것은 1965년경일 것이다.

權鎔大 씨가 ‘재일교포 모국유학생’ 신분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교포문제연구소 사무실이 있던 신설동으로 찾아와 조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權 군은 조금은 어색했지만 또박또박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히 필자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한국말을 배웠는가.

“저는 東京韓國學校 출신입니다.”

그 후, 權 군은 꾸준히 필자의 사무실을 찾아와 그는 한국의 물정을, 나는 재일교포 2, 3세들의 의식에 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한동안 왕래가 뜸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군대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윽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權 군은 재일교포 2세가 아닌가. 또한 5대 독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어떻게 군에 입대를 했단 말인가.

그와 친한 지인이 말해 주었다.
“그는 자원 입대했습니다.”

權 군은 서울대 사학과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신문학을 전공한 후, 서울대 교양학부 조교수로 있을 때 한국 군대에 자원 입대했던 것이다.

필자는 혼잣말로 “별놈 다 보겠네.”라고 생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서는 요리 핑계, 조리 핑계로 군대를 가지 않으려는 풍토가 있었는데 재일교포 유학생 출신이 자원입대라… 아무튼 權 군이 제대한 직후, 그룰 다시 만나게 됐다.
李創基 선생님과 같이.

여기에서 李 교수님에 대해 한 줄이라도 기록해두고 싶은 사연이 있다. 李 교수님은 재일교포 2세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분이시다. 서울대에 유학했던 학생치고 李 교수님으로부터 밥 한 끼 먹지 않은 학생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權 군에게 “왜 군대 갔어?”라고 힐문한 적이 있다.

權 군은 “제대로 된 한국사람 되기 위해서요.”

“군대생활을 하는데 불편은 없었어요?”라고 묻자 “역시 저는 한국사람이 덜 되어 있더라고요. ‘우향앞으로가’ ‘좌향앞으로가’ 하는 구령이 떨어지면 그 명령을 본국사람들처럼 몸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배운 우리말이라 일단 머리로 생각하고 난 뒤에 행동하게 되니 저는 항상 한 발작 늦어지는 것이었어요. 저는 역시 0.5초 차이 나는 반 쪽짜리 인생이었지요.”
李創基 선생님과 필자는 배꼽을 잡고 한바탕 웃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의 폭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權 군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선생님, 제가 키가 작잖아요. 맨 뒷줄에 서다 보니 제가 0.5초 늦어지면 저 혼자 딴 방향으로 가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니 빠따깜이지요.” 이렇게 우리는 또 한 번 폭소를 짓고 말았다.

權鎔大 씨와의 아련한 추억은 이렇게 이어지다가 지난 1971년 그가 모 처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필자 나름대로 백방 알아보았으나 어디에 무엇 때문에 잡혀갔는지 사연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보안사 문관으로 있던 A씨가 필자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는 대뜸 權 군이 徐勝이와 같이 연구소에 찾아온 적이 없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이때 필자는 ‘아, 權 군이 보안사에 끌려갔구나.’라고 직감했다.

필자는 “함께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徐勝이도 鎔大도 가끔 들른 적은 있소.”라고 퉁명스럽게 말해주었다.

그 당시 재일교포 모국 유학생들 상당수는 우리 연구소에 이따금 들리곤 했다. 자기들 문제를 연구한다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으니 자연히 찾았을 것이다. 저 유명한 재일교포 간첩단사건의 구말모, 서승, 이건의(고대 호동회장) 등이 그들이다.

權鎔大 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저는 재일교포 모국유학생 회장으로 내가 왜 이곳에 잡혀 왔는지 전혀 몰라 무척 불안했습니다. 여자를 겁탈했다거나 물건을 훔쳐서 잡혀왔으면 그 이유를 대략 아니까 버틸 수 있었겠지만 왜 끌려왔는지 영문도 모르고 하숙집에서 잠결에 잡혀 왔으니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거예요.”

그 당시 재일교포 유학생들은 누구는 경찰에 잡혀갔다. 누구누구는 보안사에 잡혀갔다. 또 누구는 정보부에 끌려갔다는 분위기에 휩싸여 일부는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돌아간 학생들도 꽤 많았다.

이와 같이 경찰, 보안사, 정보부가 경쟁하듯이 재일교포 유학생들을 ‘먹잇감’으로 삼아 잡아가다 보니 그들 중 상당수는 간첩죄로 재판에 회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중에는 적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1~2년 동안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한 자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지하실에서의 3박4일은 나에게 340일의 악몽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 만나는 자체가 두려웠지요. 어쩌다 친구와 만나 다방에 갈 때도 건장한 청년이 들어서면 꼭 나를 잡으러 오는 것으로 착각이 드는 거예요. 자다가도 악몽에 시달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든지 벌떡 일어나 서성댄다든지, 이런 일을 1년 넘게 겪어야 했지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고도 했다.

“하루는 나를 심문한 그 문관이라는 자가 만나자고 해서 또 잡혀가지 않나 겁먹어서 나갔더니 감사가 나온다며 영수증에 사인을 하라는 거예요. 무슨 영수증이냐고 물었더니 ‘당신은 내 프락치로 등록해 놓았는데 매달 얼마의 돈을 지급 받은 것으로 사인해 달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저는 두말 없이 그가 내민 영수증에 사인을 해주었어요. ‘잡혀가지만 안는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지금도 생각해보면 비굴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어요.”
필자는 이즈음 서울대 이창기 교수님이 내뱉은 말을 잊을 수 없다.

“저 아이의 보모님들이 억지로 모국에 유학 보낸 것은 모국에 가서 말도 배우고 역사도 배워서 떳떳한 한국 사람이 되라고 보냈을 터인데 그 아이들이 ‘간첩’이라고 하니 그 부모들의 회한은 어떻겠소.”

그 후, 필자와 權鎔大 씨의 교류는 거의 단절상태였다. 그런데 80년대 초반, 우연히 도쿄 나리타공항에서 그와 마주쳤다. 필자는 대뜸 “당신 지금 무엇하고 있어?”라고 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 '日韓交流한마당' 權鎔大 理事의 저서 '당신은 진정 한국을 아는가' 표지.

‘대한항공 차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필자는 대뜸 “당신, 출세했구먼!”하고 인사를 대신했다.

權鎔大 씨는 “나약하고 불완전한 재일교포였던 저를 완전한 한국 사람으로 키워준 것은 서울대학이 아니라 한국군대와 보안사였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나는 도무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덧붙인 이야기는 “그때 제가 쓰러지면 저를 따르는 많은 재일교포 후배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오기 하나로 버텨냈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필자는 유대인 어느 작가가 역사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사명감 하나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인간 세상에 사명감이란 무엇일까. 어느 땐가 權 씨에게서 그 해답을 듣고 싶다.

權鎔大 씨가 KAL에 특채로 입사했을 때 몇 가지 조건을 붙였단다. 그중 하나가 KAL에 재일교포 유학생 출신을 채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본국 대기업에 취직하기는 어려울 때였으니까. 그 덕에 교포유학생에게 취직 문이 열렸다.

그 후 대한항공에서 아시아나항공으로 이직하여 부장, 상무로 재직하는 동안 일본노선 10개, 중국노선 10개 등 27개의 노선을 개설하는데 ‘일등공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기록은 아직도 아무도 깨지 못했다고 한다. 아시아나 해외 1호 지점장(동경), 일본본부장, 중국본부장 두 본부장을 역임했는데 이 기록도 아직은 갱신되지 않았다고 한다.

   
▲ 2016년 '日韓交流한마당' 축제 포스트.

“제가 중국본부장으로 있을 때, 아시아나에서 근무 중이던 현동실 씨와 함께 저의 영원한 은사이신 서울대 李創基 선생님 내외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전 지역을 돌아보시게 하고 당신이 키운 제자들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은 지금도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權鎔大 씨도 이제 70대 문턱이다.

최근 만난 그는 ‘日韓交流한마당’이란 이색적인 명함을 내민다.

“2013년 신각수 주일대사의 권유로 이 단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NPO 법인을 만들어 주고 책임자로 임명했던 것입니다. 저는 아시아나에서명예 퇴직하면서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조국에서 큰 혜택(서울대 국비 유학)을 받았는데 그 은혜를 조국에 어떻게 갚아야 하냐를 두고 고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申 대사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드렸습니다. 이 일한교류한마당을 통해 보다 한일 양국이 진정으로 이해하고 친하게 지낼 징검다리역할을 해보자. 한일간의 갈등은 비슷하게 닮았으나 근본은 다르다는 것부터 인식하는 것이 정녕 한일 양 국민이 알아야 할 출발점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이 “같고”무엇이 “아님”인가를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의 태권도와 일본의 가라테(공수)를 함께 보게 하여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가를 느끼게 하여 상호이해를 돕자는 것입니다”

   
▲ 韓日 순회 강연을 다니느 權鎔大 이사.

이어 그는 또 “그 누구보다도 일본을 알고 한국을 아는 위치에서 자라온 재일교포는 한일 양국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만이 그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한일양국의 주변에서 맴도는 낭인이 아니라 두 나라의 이움쇠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조국을 알아야 하고 그들과 부대껴 애환을 함께해야 합니다. 제가 ‘당신은 진정 한국을 아는가’란 책을 펴낸 것도 바로 이런 연유입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영원한 번영을 염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일본 전국을 누비며 연간 10여 차례 강연도 다닌다고 했다.
權 이사의 건투를 빈다.

대담• 이구홍/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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