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처럼 악하고 소름 끼치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인간 행위 가운데 가장 야만적인 게 전쟁이다. 전쟁은 생면부지의 사람도 적이란 단 하나만의 이유로 죽여야 하고,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영웅이 된다. 하지만 전쟁이란 야만 덕분에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전쟁이 문명의 도약을 가져온 수많은 역사적 사례가 있다. 디지털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와 인터넷도 전쟁의 배 속에서 태어났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미국이 1946년 완성한 '에니악(ENIAC)'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3년 앞서 영국이 독일군 암호 작성기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콜로서스(Colossus)'를 제작했는데 군사비밀이라 공개하지 않았다. 영국은 앨런 튜링이 만든 이 컴퓨터 덕분에 독일군 암호를 풀어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인터넷도 1960년대 미 국방성이 핵전쟁으로 통신 시스템이 파괴될 경우를 대비해 데이터를 안전하게 다른 곳으로 전송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문명화된 민족을 위협하는 최고의 악은 전쟁"이라고 했던 철학자 칸트도 필요악으로서 전쟁의 문명사적 역할을 인정했다. 그는 전쟁 자체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위협이 야기하는 긴장 상태가 인간이 모든 소질을 계발하는 조건을 형성한다고 했다. 전쟁의 위협은 국가를 건전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영구 평화를 추구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핵전쟁의 불길한 기운이 한반도 상공에 떠돌고 있다. 로버트 브라운 미 태평양육군사령관은 북핵 위협을 '블랙 스완(검은 백조)'에 비유했다. 블랙 스완은 발생 가능성은 낮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 효과로 이어지는 사건을 뜻한다. 북한의 김정은뿐 아니라 북핵이 미국을 직접 위협하는 걸 좌시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트럼프 대통령도 전쟁 위험을 가중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의 화약고는 발칸반도였다. 한반도가 3차 세계대전의 화약고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냉전시대 일어난 6·25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신(新)냉전시대 한반도가 세계 평화와 경제 부흥을 위한 전쟁의 희생양이 되는 사태가 또 발생해선 안 된다. 올해 대선을 통해 새로 등장할 지도자는 전쟁 위기를 한반도 영구 평화의 기회로 전환시킬 역량을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