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채 / 논설위원

은행은 곧잘 보수적 집단으로 묘사된다. 은행원은 꽉 막힌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조그만 금융사고도 용납할 수 없는 금융환경을 감안하면 보수적이지 않을 도리는 없다. 당국자를 대하는 금융사 최고경영자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다. 박근혜 정부가 청년펀드를 만든다고 할 때도, 대우조선 사태에서 거액의 출자전환을 요구받고도 고개를 먼저 끄덕인 것도 그들이다. 융통성은 없지만 눈치는 백단이고, 작은 일에는 빡빡하지만 큰일에는 구멍 숭숭인 셈이다. 기막힌 이율배반이다. 느닷없이 고리타분한 얘기를 꺼낸 것은 신한금융 때문이다. 신한은 이 기이한 한국적 금융문화에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최고 금융그룹이 됐다. 1982년 재일동포들이 현금을 싸들고 들어와 점포 3개로 시작한 뒤 35년 만에 일군 성과이다.

이런 신한에 지난달 말 조용병 회장 체제가 출범했다. 2010년 신한사태로 당시 라응찬 지주 회장, 신상훈 지주 사장, 이백순 신한은행장이 동반퇴진하고 들어선 한동우 회장 체제 이후 6년 만의 세대교체이다. 조 회장은 취임사에서 “세계 수준의 금융사로 도약하는 여정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어제는 금융권에서 처음으로 시효소멸 채권 4400억원어치의 소각 방침을 내놨다. 이 조치로 빚을 갚지 못해 금융거래를 할 수 없었던 고객 2만명이 혜택을 입었다. 취임 기념 금융사면이다.

조 회장은 사내 회장후보추천위원회의 절차를 통해 선임됐다. 위원회는 계열사 사장 등 주요 임원들을 후보군으로 정한 뒤 경영 실적과 평판 등을 점검해왔다. 경영진 선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파벌 싸움을 막고, 외부 입김에도 흔들리지 않는 제도라고 하지만 최고경영자의 의중이 크게 작용하는 구조이다. 이번 선임 과정에서 당시 한동우 회장, 그리고 한 회장을 앉힌 라응찬 전 회장이 영향을 발휘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7년간 이어졌던 신한사태가 최근 대법원에서 신상훈, 이백순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오면서 종료됐다. 신 전 사장은 배임 등 대부분의 핵심 쟁점에서 무죄를 받아냈지만 횡령 혐의가 일부 인정돼 2000만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다만 재판부는 당시 신 사장이 라응찬 회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 개인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반면 고소 당사자인 이백순 전 행장은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고소한 사람이 피고소인보다 무거운 형을 받은 셈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만과 모르드개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신 전 사장의 명예회복 주장은 이상하지 않다.

그는 2005년에 받은 스톡옵션 행사권을 요구하고 있다. 신한 지도부는 떨떠름해한다. 한동우 전 회장은 “신한의 미래를 위해 응어리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판결이 완전 무죄는 아니라고 나왔다. 절차대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신한은 이사회 내 보상위원회를 설치해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는 2011년 라 전 회장이 당국의 중징계를 받고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스톡옵션 보류 결정을 내렸다가 회사에 중대 손실을 끼치지 않았다며 취소한 것과 대비된다.

지금의 신한 지도부는 ‘안티 신상훈’이 다수이다. 따지고 보면 한동우 전 회장을 비롯해 위성호 행장, 김형진 신한금융투자 사장, 임영진 신한카드 사장 등이 모두 라응찬 진영이다. 위 행장은 신한사태 때 라 전 회장의 입 노릇을 했다. 다만 조 회장은 다소 결이 다르다. 그가 반칙하지 않고 회장직에 오른 인물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평사원으로 입사해 지점장, 뉴욕지점장, 글로벌사업본부 전무,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대표, 신한은행장을 지냈다. 마라톤 풀코스를 수차례 완주해 스스로 ‘용병처럼 일한다’고 말할 만큼 추진력이 강하다. 그가 행장 시절 도입한 레드팀 제도는 지금도 곧잘 회자된다. 임원진을 블루팀, 레드팀으로 나눠 레드팀으로 하여금 다수 의견과 반대되는 입장을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관행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의사결정의 오류를 줄이자는 취지이다.

신한사태는 19년이나 장기 집권해온 전문경영인이 후계자로 부상한 인물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라응찬 회장은 신한의 성공신화를 일궈냈지만 노욕으로 은행 신뢰를 추락시켰다. 성과가 좋은 CEO라도 오래 군림하면 권력이 집중돼 내부 견제가 어려워진다. 당시 사태의 망령은 신한이 반드시 청산해야 할 과제이다. 방법은 과거의 적폐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당사자를 위로하는 것이다. 회장이라고 스스로 레드팀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좌고우면할 필요도 없다. 신한이 집단 순응 사고의 위험성에서 벗어나 화합하는 것은 한국 금융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