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 국제부 차장

1890년 미국 인구조사국은 "이제 미국 내 개척지는 모두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1776년 독립 이후 개척을 동력 삼아 발전했기 때문에 '개척지 소실(消失)'이란 뉴스는 지속 발전을 원했던 미국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미 해군학원 원장이던 앨프리드 머핸(Mahan)이 쓴 책이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다.

'해군의 성경'으로 불리는 이 책은 "해상에서 실력, 특히 국가 이익이나 무역과 관련한 주요 교통로의 해상 실력이 번영을 위한 핵심 요소"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국이 200년간 번영했고, 독일과 일본이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비결은 해군력 강화에 있다고 설파했다. 육지 개척지를 소진한 미국은 '머핸주의'에 귀를 기울였다. 1890년부터 해군 건설에 박차를 가하더니 5년 만에 해군력을 세계 12위에서 5위로 끌어올렸다. 이어 하와이·필리핀·괌·푸에르토리코를 차례로 장악했다. 2류 국가이던 미국이 패권국으로 도약한 발판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였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대륙 국가였다. 명(明)대 환관 정화의 남해 원정을 빼면 해군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에 '해양 강국'이란 개념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1982년 해군 사령관에 오른 류화칭(劉華淸)이다.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류화칭은 서태평양의 섬들을 사슬처럼 연결한 가상의 선인 '도련선(島鏈線)'을 그었다. 제1도련선은 오키나와~대만~필리핀을 잇고, 제2도련선은 요코스카~괌~파푸아뉴기니를 연결한다. 2차 대전 이후 태평양을 장악해온 미 해군을 최소한 남중국해, 나아가 서태평양까지 진출해 제압하겠다는 것이다. 류화칭은 1980년 중국군 최초로 미 항공모함에 올랐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해군의 항모 보유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가 '항모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이유다.

태평양을 마주 보는 두 명의 '스트롱맨(strongman)'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모두 해군에 관심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초 해군 항공 재킷을 입고 새로 건조 중인 핵 추진 항모 제럴드 R 포드함에 승선해 "현재 10척인 핵 항모를 12척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미 군함을 274척에서 350척으로 증강하는 것도 트럼프의 목표다. 시진핑의 중국은 해군 창설일인 다음 달 23일 첫 자체 제작 항모인 산둥함을 진수할 계획이다. 첫 보유 항모 랴오닝함은 작년 12월 구축함·잠수함 등으로 전단을 꾸려 사상 처음으로 제1도련선을 돌파해 서태평양에서 실전 훈련을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올 초 "최근 중국의 행보는 미국 머핸주의를 닮았다"고 했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오늘 처음으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우리 시선은 북핵과 사드에 꽂혀 있지만, 두 스트롱맨의 관심은 남중국해 등 해양을 둘러싼 안보·무역 패권에 더 쏠려 있을지 모른다. 북핵과 사드가 협상 판의 '칩'으로 거래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